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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주동식 "술먹으면 최해식이 아직도 전화"

민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3-09-16 10:25 | 최종수정 2013-09-16 16:18


13일 도쿄 신주코의 한 호텔에서 만난 주동식 전 KIA 투수코치. 도쿄=민창기 기자 sportschosun.com

재일교포 언더핸드스로 투수 주동식(65). 젊은 팬들에게는 다소 희미해진 이름이지만, 올드 팬과 타이거즈 팬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이름이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2년째인 1983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해 2년 간 뛰며 타이거즈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한국야구와의 인연은 선수생활을 마친 뒤에도 이어졌다. 2002년 2월 KIA 타이거즈의 하와이 스프링캠프에 투수 인스트럭터로 합류해 루키 잠수함 투수 신용운을 지도했다. 당시 KIA 사령탑이 선수시절 부터 가깝게 지냈던 김성한 현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다. 주동식은 "나이 차이가 있었으나, 선수시절에 강한 성격 등 기질적인 면에서 김성한은 나와 잘 맞았다"고 했다. 그해 KIA는 그를 투수코치로 불렀고, 2003년 까지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 사이타마 TV와 케이블 TV에서 각각 10년, 15년 간 해설을 하던 주동식은 미련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13일 도쿄 신주쿠의 한 호텔 로비에서 주동식 전 코치를 만났다. 사업가로 자리를 잡은 그는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도쿄 지역에 일본식 주점인 스넥을 세 군데 운영하고 있고, 무역관련 회사 설립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공식적으로 야구를 떠난 지 10년이 됐지만, 한국 프로야구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국내 선수를 지도하고 싶다고 했다. 호시노 센이치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66), 다카키 모리마치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72)을 거론하며 "야구 지도자의 나이와 지도력은 아무 상관이 없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고 강조했다.

해태 시절 야구인들과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2월 오키나와 한화 캠프를 찾아가 김응용 감독, 김성한 수석코치 등과 함께 식사를 했고, 김 수석코치가 광주에서 운영하고 있는 중국음식점에도 세 번 정도 간 것 같다고 했다. 주동식은 "코치 시절 함께했던 포수 최해식이 술을 먹으면 꼭 전화를 한다"며 웃었다. 지난해 광주를 찾았을 때 새 경기장 둘러본 그는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주동식은 한국 프로야구 출범에 깊이 관여했던 재일교포 야구인 장 훈씨의 권유로 한국행을 결정했다. 장 훈씨와 아버지가 한신 타이거즈와 재계약이 확정된 상황에서 주동식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주동식은 "도에이 플라이어스에서 함께 뛰었던 장 훈 선배가 한국야구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도 내가 고국에서 공을 던지는 걸 보고싶어 하셨다"고 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주동식의 부친 고 주광희씨는 재일민단 부단장까지 지냈다. 평안남도 출신으로 김응용 감독과 동향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해 한국시리즈 때 아들이 던지는 모습을 보러 한국을 찾았다.

주오대학을 졸업한 주동식은 1972년 니혼햄 파이터스의 전신인 도에이에 입단했다. 도에이에서 10년, 1982년 한신 타이거즈에서 1년, 총 11년 동안 활약하며 16승19패, 평균자책점 3.97을 기록했다.

주동식은 지금도 한국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불편한 일이 많았을 것 같다'고 하자 주동식은 "외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국적을 유지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귀화를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는데 '아빠 죄송해요'라면서 생활이 불편해 귀화를 하겠다고 해 말리지 않았다"고 했다.


2002년 2월 KIA 타이거즈 하와이 스프링캠프에서 인스트럭터로 언더핸드스로 투수 홍찬영을 지도하고 있는 주동식 코치. 스포츠조선 DB
해태 시절로 이야기가 넘어가자 주동식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많은 말을 했다. 주동식은 "입단 때 약속한 걸 구단이 거의 들어주지 않았다. 이를테면 숙소로 제공한 방이 몇 개라는 식으로 일본, 미국은 계약 때 약속을 하면 지키는 데 해태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아파트의 방 전등이 갑자기 떨어져 깜짝 놀랐던 기억을 떠올리며 활짝 웃었다. 주동식은 당시 해태가 제공한 아파트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연봉은 1000만엔. 당시 수준에서도 상당한 액수였다. 그런데 가족을 도쿄에 두고 와 두집 살림을 하다보니 돈을 모으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해태 시절 무엇보다 그를 분개하게 한 것은 돈에 관련한 구단 행태였다. 구단은 1983년 전기리그에서 7승을 거둔 주동식을 후기리그 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마운드에 올리지 않았다. '던지고 싶다'고 하며 "넌 한국시리즈 때 쓰려고 아껴두려는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주동식은 첫 해를 7승으로 마감했다. 전기리그에서 7승을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했는데, 후기리그에서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것이다. 그는 "10승을 거두면 보너스를 받기로 계약이 돼 있었다. 구단이 이 보너스 지급이 아까워 등판을 막은 것이다"고 했다.

1983년 해태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우승을 하면 수훈선수들의 연봉은 당연히 인상이 되어야 하는데, 해태는 슬쩍 넘어가려고 했다. 이때 주동식을 비롯한 선수들이 함께 나서 구단과 싸웠다고 한다.

주동식은 1983년 30경기에 등판해 7승7패3세이브 평균자책점 3.35. 1984년 18경기에 나서 6승5패, 평균자책점 2.27을 기록한 뒤 한국을 떠났다.

프로야구 초창기에 재일교포 선수들은 일본의 선진야구를 국내야구에 전수, 한국야구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들은 때때로 한국어가 서툴러 '반쪽바리' 소리를 듣는 등 설움을 겪어야 했다. 일본에서는 한국계라고, 한국에서는 일본 출신이라고 수군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대구 원정 경기 때 재일교포 포수 김무종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와 호텔로비에서 울면서 '차별하지 마라'고 외쳤다. 그 때 로비에는 해태 선수는 물론, 일반인들도 많았다. 모두에게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2년 간의 해태 선수 생활은 그의 야구인생에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주동식은 "당시에는 한국에 간 걸 굉장히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참 소중했던 경험이고 추억이었다. 난 버럭 화를 냈다가도 안 좋았던 일은 금방 잊어버린다. 다른 한국인 처럼 말이다"며 웃었다.

그가 선수로 뛰었던 1980년대 초에는 한국과 일본야구의 수준차이가 컸다. 그러나 지난 30년 간 한국야구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일본을 바짝 따라잡았다. 주동식은 "한국야구는 메이저리그의 파워와 일본야구의 세밀함을 모두 갖추고 있다. 아주 재미있게 한국야구를 보고 있다"고 했다.


도쿄=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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