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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화려했지만, 가장 힘들었던 일본 생활
박-20대가 없었다고 했는데 그 때 결혼도 하고 출산도 했어요.
임-남들은 연애도 많이 하고 결혼도 하잖아요. 저는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가 애 아빠를 만났어요. 처음엔 친구로 지냈는데, 애 아빠가 힘들게 살았는데, 성격상 끌려가게 되더라고요. 부모님께서 반대가 심했죠. 그때는 반대하는 부모님이 미웠어요. 반대를 무릅쓰고 '내가 알아서 잘 살겠습니다' 했는데 지금은 혼자가 됐죠. 시드니 올림픽을 출전을 앞두고 아이가 생기면서 진짜 많이 울었어요. 남편이 '아이만 낳아줘. 내가 다 키워줄게' 딱 한마디 했는데, 제가 순진해서 그 말에 올림픽 포기하고 아이를 선택했죠. 당시엔 은퇴 생각도 했어요. 여자 선수들은 결혼하고 임신하면 은퇴거든요. 임신 했을 때 '남자로 태어났으면, 남자가 너무 부럽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은퇴 하겠다' 생각을 했는데 ,일본팀 오너가 '넌 감독이니까, 선수 안 해도 되잖아. 아이 낳고 바로 복귀해라'하더라고요. 그 말 한마디가 정말 기뻤어요. 그래서 임신하고 6개월 간 코트에서 선수로 뛰었고, 아이 낳기 2일 전까지 코트에서 결승전 치루면서 우승시켰고, 바로 아이 낳고 2주 후에 복귀했어요.
임-가장 기억하기 싫은 게 당시 생활이에요. 은퇴는 하지 말고 감독만 하라는 게 정말 고마운 거예요. 그 걸 보답해야 하고, 단체 생활에서 내 공간을 다른 선수가 대신하는 것도 좀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갑자기 코트를 떠날 수가 없어서, 6개월까지 코트를 뛰었어요. 이후에 쉴 때는 다이어트를 했어요. 몸이 많이 부으면 코트 복귀하는데 지장이 있을 거 같아서, 그래서 제가 딱 5㎏ 찌웠어요. 배고플 때마다 물을 마셨어요,
박-아이가 몇 ㎏으로 태어났나요?
임-3.2㎏으로 태어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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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몸 자체는 빠진 거죠. 계속 운동을 했으니까요. 독종이란 소리를 듣는데, 전 사람들이 좋은 독종이라고 봐줬으면 좋겠어요. 저도 사랑 받고 싶고, 입덧할 때 먹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데 혼자 있었어요. 아이 아빠는 1200㎞ 떨어진 한국에 살았고, 각자 일을 했죠. 부모님도 멀리 있었고요. 어린 나이에 감독을 하니까 선수들에게 기댈 수도 없었고, 일본이란 곳이 개인주의 문화이고 그래서 기댈 데가 없었어요. 항상 혼자 방콕하고 배고프면 물마시고, 훈련 나가고, 남는 시간에 음악 듣고 책 읽고 그랬죠. 그렇게 아이 낳고 2일 뒤에 윗몸일으키기 하고, 몸 만들었어요.
박-아무리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2주면 남들은 조리원에서 몸조리만 하는 기간이에요.
임-'은퇴를 하느냐', 좀 무리를 해서 '빨리 복귀를 하느냐'였어요. 선수로서 전례가 없었죠. 임신하고 운동한다는 전례도 없었고요.
박-도대체 무엇이 임오경 감독님을 그렇게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거죠? 사명감, 책임감,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약속입니까?
임-성격 자체도 있는 거 같아요. 어린 나이에 감독이라는 책임감. 어릴 때 조직생활을 하면서 조직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게 몸에 밴 거 같아요. 그리고 고마움에 대한 표시. 그래서 2달 만에 복귀해서 경기를 뛰었죠.
박-2주 만에 감독직을 복귀하고, 2달 만에 경기를 뛰어요? 임신 6개월까지 경기 뛴 거랑 버금갈 정도로 놀라워요. 아기 낳아본 사람들은 알거든요.
임-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때 사진도 다 있어요. 창피한 거지만, 당시에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지 못했어요. 약으로 조절을 했는데 그래서 밝은 색 유니폼을 못 입었어요. 코트에서 뛰고 있으면 앞이 다 젖고 그랬죠. 저 때문에 항상 어두운 유니폼을 입었어요. 월급만 받으면서 감독하는 거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런 대우를 받았고, 그리고 선수들한테 너무 미안했어요. 그 대회 최종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하면서 8년 연속 우승이라는 일본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죠. 제가 중간에 스톱했으면 그 기록도 경신하지 못했을 거예요.
박-결과는 좋았지만, 그만큼 본인은 힘들었을 거예요. 최연소 국가대표, 최연소 감독, 최초 여자감독이란 타이틀은 얻었지만 그 이면에 이런 노력들을 하신 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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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편이 아이를 낳으면 다 키워준다고 했는데 약속을 지켰나요?
임-믿었던 제가 바보죠.(웃음) 남편은 남편 일에 전진했고, 저는 아이 낳고 몸 만드는데 많이 힘들었죠. 갓난아이일 때는 괜찮았어요. 바구니에 넣고 체육관에 다니면서 운동하다가 울면 우유 먹이고 그러면 괜찮았는데, 아이가 성장하면서 몸이 두, 세 개라도 모자라더라고요. 운동하랴, 감독하랴, 엄마, 와이프, 며느리 역할까지 5가지 역할을 하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아이 낳고 아프진 않았는데, 3년 뒤에 후유증이 나타나서, 하반신 마비가 왔어요. 한국에 와서 병원 가고 약도 먹고 그랬죠. 아이가 점점 커가니까 너무 힘들어졌어요. 남편한테 요구를 해도 도와주지 않더라고요. 면역력이 다 떨어져서 계속 아프고 감기 걸리고, 기댈 곳이 없었어요. 한번은 남편이 주말에 일본에 놀러왔는데, 제가 남편한테 밥 해주고 빨래하고, 아이 챙기고 하다가 40도 가까운 고열로 쓰러졌어요. 주말 지나서 저를 놔두고 혼자 가는 남편이 너무 밉더라고요. 그때 아이를 안고 링거를 맞는데 한 쪽엔 아이가 누워 있고 그랬어요. 그때 집에서 해서는 안 될 결정을 했어요. 약을 두 번이나 먹었어요. 우울증이란 걸 그때는 몰랐어요. 운동은 책임감에 다녀오지만, 집에 오면 아이를 빨리 재우고, 그때부터 쳐져있는 거예요. 커튼도 안 열고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아이 때문에 못하다가 결국 약을 두 번이나 먹고 다시 살아났죠. '미친 짓이었구나. 이 아이는 어떡하나' 그러면서 울었어요. 그때 내 자신을 위해서 살아보자. 내 자신이 먼저 살아야지, 애도 살고 나도 살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박-아이는 기억을 못하겠지만, 엄마는 그때 진짜 힘들었네요.
임-이제는 얘기 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한국에 와서도 잊을 수가 없어서 울고 그랬어요. '왜 그렇게 바보처럼 혼자 외롭게 살았을까? 가족도 있고 한데' 그래서 제가 살기 위해 대한민국에서 콜을 했을 때 일본의 부귀영화, 그 좋은 자리 제쳐놓고 온 거예요.
박-엄마가 울고 있는 자식을 저버리려고 했을 정도면 그 마음이 어땠을까 싶어요.
임-저를 살린 것도 아이에요. 배고프다, 목마르다면서 저를 깨웠어요. 전 기억을 못하는데, 제가 일어났더니 냉장고 앞에 있더라고요. 다섯 살쯤인데 아이가 엄마가 안 일어나니까, 물을 줬더니 그때 눈을 떴다고 그래요. 전 기억이 없지만, 아이한테 들어서 기억이 있는 거죠. 아이 때문에 살아서 제가 다시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말고, 진짜 아이하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 그리고 남편에게 의지하지 말자. 그때부터 편하게 살았어요. 아이하고 진짜 재미있게 살고 있어요.
박-남편하고 이별을 하셨잖아요. 그 영향도 있었나요?
임-크게 그런 건 아니고, 제가 우리 떨어져 살자 그랬어요. 결혼하면서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쿨하게 허그 하면서 헤어졌어요. 여자 입장에서 제걸 포기하고, 대접도 좀 해주고 그랬어야 했는데 저는 제 일을 계속 했잖아요. 당시엔 여자가 내조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그걸 못 해줬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도 있었죠. 쿨하게 헤어졌고, 두 번 다시 의지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죠.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기 때문에, 웬만한 힘든 일이 생겨도 그때 생각하면 이정도 쯤이야. 이런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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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라=박종권 기자 jkp@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