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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야, 가서 진영이한테 물좀 끼얹고 와라."
"네!"
순전히 상상이지만, 아마 LG '큰' 이병규와 고졸 2년차 투수 임찬규 사이에 이같은 대화가 오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확인해봤다.
임찬규가 요즘 제구가 안돼 다소 고전하더니, 이날 물을 뿌리는데도 조금 과격했다. 이진영 옆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던 리포터도 덩달아 물벼락을 맞았다.
보통의 축하 세리머니와는 약간 달랐다. 임찬규는 92년생, 이진영은 80년생이다. 띠동갑 선배에게 물을 끼얹다니. 달라진 프로야구 세태를 보여준 풍경이었다. 그 옛날 기강 세기로 유명했던 해태 시절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메이저리그의 사례
메이저리그의 경우엔 훨씬 예전부터 이런 세리머니로 수훈선수를 축하하고 팬들에게 웃음을 선사해왔다. 이같은 세리머니를 할 수 있는 선수가 팀마다 대략 정해져있다. 지난 2004년 플로리다(현 마이애미) 말린스의 경기를 직접 보면서, 그 팀에선 조시 베켓이나 A.J. 버넷 같은 투수가 이 역할을 한다는 설명을 팀 관계자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엔 '크림 파이를 어디서 저렇게 매번 갑자기 구할까'라는 의문이 있었지만, 곧이어 "보통 라커룸에 있는 면도용 크림을 사용한다"는 설명도 들었다. 당시 말린스 소속이었던 최희섭도 좋은 타격을 한 날 인터뷰때 베켓에게 한번 당했다.
메이저리그에선 보통의 경기에선 이같은 세리머니가 나오지 않는다. 극적인 홈런, 순위싸움이 한창일 때 1등공신이 된 선수, 플레이오프 승리투수 등 나름대로 조건이 있다고 한다. 또하나, 평소 팀동료와 원만한 관계가 아닐 경우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최희섭은 그해에 브래드 페니, 칼 파바노 등 동료투수들의 집에 초대받는 등 팀융화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당시 MLB.com의 말린스 담당기자 조 프리사로는 "아주 좋은 일이다. 최희섭이 동료들에게 당당하게 인정받은 셈이다"라고 말했다.
사건의 진상과 덜덜 떤 임찬규
이날 이진영은 물벼락을 맞은 뒤 "임찬규였다. 보복하겠다. (내가) 선배니까 강압적으로 배트를 사용하겠다"며 웃었다. 물론 농담이다. 실제로는 인터뷰가 끝난 뒤 라커룸에 돌아가 임찬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꿀밤을 가볍게 한대 먹였다고 한다.
확인해보니 '큰' 이병규의 지시였다. 당연한 일이다. 임찬규가 열두살 많은 선배한테 본인 의사로 물을 뿌린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임찬규의 증언이 재미있다. "이병규 선배님이 시켜서 물통 들고 나가는데, 하늘같은 선배님한테 하는거라 사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에도 의혹이 있다. 임무를 마치고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임찬규의 발걸음과 표정은 너무나 가볍고 유쾌해보였다. 이날 밤 광주 원정을 떠나는 LG 구단 버스가 흥겨웠을 것이다.
해태 시절이었다면 가능했을까
궁금증이 생긴다. 한국프로야구에서 기강 세기로 유명했던 팀이 바로 옛 해태다. 그 시절이었다면, 아무리 기분 좋은 일이더라도 까마득한 후배가 띠동갑 선배에게 이같은 세리머니를 할 수 있었을까.
10여년 전 해태에서 KIA로 바뀌기 전 시절, 광주구장의 라커룸 한켠에 커다란 캐비넷이 놓여있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뒤쪽에 공간이 있었다. 알고보니 그 공간은 후배가 잘못했을 때 선배가 데리고 가서 한마디 하던 장소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지만, 20년 전의 해태를 평가할 때면 깍듯한 선후배 관계가 응집력으로 이어졌다고 얘기하는 야구인들도 많다.
해태 출신의 모구단 A코치에게 물어봤다. A코치는 "그 시절이야 TV 생중계 인터뷰란 게 없었으니까 그럴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인터뷰가 있었다 해도, 감히 후배가 선배한테 물을 끼얹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선배한테 말 한번 거는 것도 어렵던 시절이니까"라고 말했다. 캐비넷 뒤로 끌려갔을 것이란 의미다.
'띠동갑 물폭탄'에 담긴 의미
또다른 구단의 B코치는 "굳이 해태가 아니더라도, 우리팀 같으면 지금도 띠동갑 선배에겐 그러지 못한다. 열살 이상 차이나는 선배에겐 '형' 소리는 꺼내지도 못하고 '선배님'이라고 부른다"며 웃었다.
그런데도 LG에선 지금 그게 가능하다. 일단 '민선 주장'을 맡고 있는 이병규가 분위기를 흥겹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막내급인 임찬규에게 지시했을 것이다. 임찬규가 하루전인 23일 넥센전에서 이택근과 박병호에게 연속타자 홈런을 맞았다는 점도 기억해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막내의 '폭주'에 여러 사람이 웃었지만, 막내 본인도 하루전의 쓴 기억을 싸그리 날릴 수 있었지 않을까.
올해 LG 선수단의 분위기가 밝아졌다는 사실이 이같은 사소한 해프닝을 통해 설명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최근 6개월 사이에 주전포수 1명, 주전 외야수 1명, 불펜 핵심투수 1명, 그리고 붙박이 선발투수 2명이 서로 다른 사연 때문에 전력에서 이탈한 LG가 지금의 호성적을 거두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진영은 "물벼락을 맞을 거라고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이길 때 이런 이벤트, 기분 좋다. 물벼락 자주 좀 맞았으면 좋겠다. 라커룸에 들어가서 찬규에게 꿀밤 한대 줬다"고 말했다.
김남형 기자 star@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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