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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김영록 기자]'꽃할배' 이순재가 '하와이애국단'의 비극을 재조명한다.
1932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일어난 23세 청년 윤봉길의 폭탄 의거 당시 이를 주도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지도자였던 백범 김구는 이 윤봉길 의거에 필요한 물통형·도시락형 폭탄의 제작하는데 하와이 동포들이 보내온 자금을 사용했다고 《백범일지》에 술회했다.
그 하와이 동포들은 훗날 '하와이애국단'이라고 불린 8인의 비밀결사. 이들 중 2명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지만 나머지 6명은 갖은 이유로 소리 소문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들은 과연 누구이며 우리는 왜 그들을 모르고 살았는가. EBS가 한국 방송사상 최초로 조명하는 하와이애국단은 광복 70여 년이 지나도록 한국 독립운동사가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한계들을 종합적으로 시사하는 사례이다.
◆ 하와이 사람들도 모르는 하와이애국단, 그 비극의 역사
제작진은 각종 문헌을 통해 하와이애국단의 존재와 활약상을 밝힌다. 그리고 하와이애국단의 단원들이 대거 하와이 외곽 소도시인 와히아와 소재 올리브연합감리교회 교인들로 구성되었다는 점도 밝혀낸다. 천신만고 끝에 하와이애국단원 김예준(1880~1970) 선생의 장남(김영호, 88세)을 찾아내지만 첫 반응은 "우리 아버지는 지독한 구두쇠여서 독립운동 자금을 댔을 리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왜 김 씨는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전혀 모르는 것인가. 이는 김 씨 가족뿐만 아니라 하와이 한인사회 일각에 만연한 분위기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결사'라는 방식을 택한 원인 외에도 이미 1920년대에 이승만 지지세력(동지회)과 반이승만 세력(국민회)으로 양분된 하와이 한인사회의 갈등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1945년 조국이 광복을 맞이했지만 1948년 이승만이 남한의 초대 대통령에 오르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오랜 기간 후원했던 국민회 출신들은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와이 총영사관에서 한국행 비자 발급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사탕수수 농장이나 세탁소 등에서 고된 노동 속에서도 임금의 절반가량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바쳤고 결국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게 된 그들이지만 결국 마음속에 고국을 지운다. 그렇게 70년이 흘렀고 역사는 소리 없이 단절됐다. 가족에게는 인색했던 아버지가 독립운동 자금책이라는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88세의 나이에 처음 알게 된 김영호 씨는 아버지의 묘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 '꽃할배' 이순재가 들려주는 흥미진진 독립운동사
하와이애국단의 흔적을 찾기 위해 80대 중반의 대한민국 현역 최고령 대배우가 폭염 속의 하와이 현지 구석구석을 누볐다. 배우 이순재(84) 씨가 바로 이 대기획 시리즈의 진행자이다. 좌우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존경받는 원로이자 일제강점기를 12년간 살아본 유경험자로서 균형 잡힌 안목으로 질곡과 극복의 한국근현대사를 재조명한다.
프로그램을 연출한 EBS 허성호(36) PD는 "이 선생님께서 한낮의 폭염 속에서도 하와이애국단의 흔적을 하나라도 찾아내기 위해 대단한 열의를 보였다"며 "자라나는 세대에 구별 짓기와 차별이라는 악습을 물려줘선 안 된다는 사회 원로로서의 의지가 이번 프로그램 속에 잘 드러나있다"고 밝혔다.
'제1부 프롤로그: 하와이애국단을 찾아서' 편에서는 분열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안타까움과 기성세대에 대한 반성이 한국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또한 하와이애국단을 찾아 나선 '직진 순재'의 분투기와 배우 인생 최초로 출연자 중 최연소자가 된 이순재 씨의 색다른 경험을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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