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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경주한수원에서 김풍주 코치님을 만나면서 다시 꿈을 꾸게 됐다. 내가 대표팀에서 다시 경쟁하길 바라셨다. 선생님 품격에 걸맞은 좋은 제자가 되고 싶어졌다."
'김풍주'라는 세 글자는 대한민국 레전드 골키퍼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1983년 멕시코세계청소년축구(현 20세 이하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끈 바로 그 수문장이다. 전설로 회자되는 부산 대우로얄즈의 '원클럽맨 골리'로 한시대를 풍미한 그는 통산 181경기(1983~1996년)에서 158실점했다. 경기당 단 0.87골, 경기당 1골 미만의 실점률을 기록한 K리그 유일의 '야신클럽' 골키퍼다.
태극마크를 달고 맹활약했지만, 월드컵 무대에서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단 1실점하고도, 본선을 앞두고 무릎 인대 파열로 좌절해야 했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도 김 호 감독의 부름을 받았지만, 발목 부상으로 나서지 못했다.
김 코치는 2013년 WK리그 이천 대교, 2015년 여자축구 20세 이하 대표팀 코치를 거쳐 지난해 새로이 창단한 신생팀 경주한수원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축구의 길을 포기하려던 '골키퍼 후배' 윤영글을 만났다.
윤영글에게 김 코치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이었다. 스물일곱 나이에 뒤늦게 수비수에서 골키퍼로 전향하며 마음고생이 심했다. 한국나이 서른, 더 이상 축구선수로 성장할 수 없겠다는 암담함에 사로잡혔다. 축구를 내려놓으려던 순간, 김 코치가 "함께 한번 해보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1년 후 윤영글의 세상은 180도 달라졌다. 감히 꿈조차 꾸지 못했던 '대표팀 제1키퍼'가 됐다. 사상 첫 2회 연속 월드컵 진출의 역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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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코치는 요르단여자축구아시안컵에서 첫 메이저대회 골키퍼 장갑을 낀 제자 윤영글의 경기를 매의 눈으로 지켜봤다. "당연히 영글이의 경기를 모두 봤다. 나도 같이 뛰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하더라"며 웃었다. "첫경기 호주전에서 자신감 있게 리드하는 모습을 보고, 마지막까지 잘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믿고 기대했다"고 했다. 윤영글은 호주(0대0무), 일본(0대0무), 베트남(4대0승), 필리핀전(5대0승) 4경기 무실점으로 스승의 기대에 보답했다.
김 코치는 지난 1년간 윤영글의 훈련과정을 설명했다. "영글이는 기본 신체조건, 순발력, 빌드업 등은 좋은데 골키퍼가 갖춰야할 풋워크, 다이빙, 점프 등 기본기술이 부족했다. 기본기 없이 요령만 갖고 있다보니 한계에 부딪쳤다. 기본기를 잘 갖춰야 그 바탕 위에서 창의적 플레이도, 성장도 가능하다. 지난 1년간 기본기를 단단하게 하는데 집중했다." 사제의 열정이 통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영글이는 받아들이는 태도가 좋다. 워낙 노력하는 선수다. 그래서 단기간에 변화가 가능했다."
요르단에서 돌아온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윤영글은 WK리그 개막전 그라운드에 섰다. 김 코치는 "피곤했겠지만, '강팀' 현대제철과 붙는 만큼 영글이가 좀더 해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고 했다. 요르단아시안컵 이후 윤영글은 또 한번 성장했다. 김 코치는 "확실한 자신감이 생겼다. 컨트롤도 좋아졌다. 어떨 때 기다리고, 어떨 때 나가야 하는지 수비 리딩과 판단력이 더 좋아졌다. 동료 선수들도 경기할 때 편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선수로, 지도자로 풍부한 경험을 지닌 '야신' 김풍주 코치는 윤영글의 세상 든든한 '빽'이다. 김 코치는 못 다이룬 월드컵의 꿈을 제자 윤영글과 함께 꾸게 됐다. "월드컵에서 상위 랭커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업그레이드돼야 한다. 저도 열심히 연구하고 한두 개라도 더 가르치고, 부족한 부분을 조금이라도 채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김 코치님 덕분"이라는 인사에 "제가 가르친 부분도 있지만 선수가 잘 받아들인 덕분"이라며 한사코 손사래 쳤다. "마음 맞는 좋은 선수와의 만남은 지도자에게 말할 수 없이 큰 복이다. 앞으로 성장할 일, 더 올라갈 일만 남았다. 부족한 점을 함께 잘 채워가겠다"며 미소 지었다.
인천=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