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미 대표 몬테레이(멕시코)와의 클럽월드컵 준준결승전을 앞둔 9일 오전. 김호곤 울산 감독은 숙소 주변을 계속 서성였다. 어찌보면 긴장되는 것이 당연했다. 2000년 부산 지휘봉을 잡은 이후 클럽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뒤져 있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지난달까지 자국리그와 대륙별 클럽 대항전 성적을 점수로 환산해 산출된 국제축구역사통계재단(IFFHS) 클럽랭킹에선 울산이 35위(187점)로 몬테레이(50위·169.5점)를 앞섰지만 숫자일 뿐이었다. 해외 베팅업체는 몬테레이의 승리를 점쳤다. 김 감독은 의외성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항상 상대를 분석하고도 의외성이 많기 때문에 이기기 힘든 게 축구다." 그래도 아시아 대표로서의 자존심은 지켜야 했다. '현미경 분석'으로 몬테레이를 파헤쳤다. 상대의 공수 전술이 담긴 CD를 나눠주고 훈련을 나가기 전 미팅을 통해 주지시켰다.
승부수는 후반에 띄우기로 했다. 아시아 정상을 품은 '철퇴' 전략이 세계 무대에서도 통하길 기대했다. 움크리고 있다가 강력한 한 방으로 상대에게 치명타를 날리겠다는 그림이었다. 울산에는 강력한 무기가 하나 더 있다. 세트피스다. 코너킥과 프리킥 상황에서 공중볼 장악 능력이 뛰어난 두 선수에게 기대를 걸 수 있었다. '장신 공격수' 김신욱(1m96)과 '골 넣는 수비수' 곽태휘(1m85)다. 평균 키가 1m81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몬테레이와의 공중볼 싸움에서 유리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울산의 '철퇴축구'는 몬테레이의 벽을 넘지 못했다. 제 색깔을 내지 못했다. 상대의 전략에 말려들었다. 몬테레이는 '김신욱 봉쇄'에 심혈을 기울였다. 올시즌 '헤딩의 신'으로 거듭난 김신욱의 탈아시아급 헤딩력도 2~3명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했다. 포스트 플레이가 전혀 이뤄지지 않자 공격은 맥을 추지 못했다. 패스의 정확성도 문제였다. 부정확한 패스로 공격 점유율을 높이지 못했다. 전반 울산의 공격 점유율은 36%에 불과했다. 문전 앞에서의 세밀함도 떨어졌다. 전반에 단 한 개의 슈팅도 날리지 못했다.
심리적으로도 쫓겼다. 전반 9분 만에 선제골을 허용했다. 울산의 수비 조직력이 정비되기도 전 페널티박스 왼쪽을 돌파한 니그리스의 땅볼 크로스를 쇄도하던 코로나가 가볍게 밀어 넣었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울산은 후반 중반까지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후반 16분에는 오른쪽 측면에서 올린 이 용의 크로스를 쇄도하던 김신욱이 발을 뻗어 슈팅을 날렸지만 아쉽게 골 포스트를 살짝 벗어나고 말았다. 시간은 흘러갔다. 골 소식 요원했다. 울산과 몬테레이의 차이점은 문전에서 발생했다. 세밀함의 차이였다. 화려한 개인기를 앞세운 남미 축구를 구사한 몬테레이는 울산의 밀집 수비진을 짧은 패스로 뚫어냈다. 울산은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펼치지 못했다. 그러다 후반 두 골을 더 내줬다. 후반 39분과 43분, 아르헨티나 전 국가대표 출신 세자르 델가도에게 연속골을 허용했다. 울산은 후반 44분 이근호의 중거리 슛으로 한 골을 만회했지만 분위기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1대3으로 무릎을 꿇었다.
유럽 대표 첼시와의 꿈의 대결도 물거품이 됐다. 역대 아시아 챔피언으로 클럽월드컵에 참가했던 K-리거 팀들(2006년 전북, 2009년 성남, 2010년 포항) 중 전북에 이어 두번째로 첫 경기에서 패하는 굴욕도 맛봤다.
경기가 끝난 뒤 김 감독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김 감독은 "우리만의 플레이를 하지 못했다. 아시아챔피언스리그 때 보여줬던 '철퇴축구'를 살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공수밸런스가 적절치 못했고, 수비시 일대일 능력이 부족했다. 큰 경기에 대한 경험 부족도 느꼈다"고 덧붙였다. '김신욱 봉쇄'에 허를 찔린 부분에 대해서는 "그동안 김신욱의 컨디션이 좋았다. 제공권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하피냐 이근호와 다양한 공격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상대 수비에 따라 적절하게 움직여줬어야 했는데 아쉽다"고 했다. 비록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지만 아직 울산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5~6위전(12일 오후 4시·일본 도요타)이 기다리고 있다. 김 감독은 "5~6위전에서 '철퇴축구'를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아시아 축구가 세계의 벽을 넘긴 어렵겠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