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선수가 놀란 스페인 축구, 최강희호의 고민

김성원 기자

기사입력 2012-05-31 14:23



그라운드에는 11명씩 섰다. 숫자에 불과했다. 볼은 인간보다 빨랐다.

볼줄기는 품격이 달랐다. 90%에 가까운 패스 성공률로 경기를 지배했다. 수비형 미드필더 사비 알론소(레알 마드리드)가 후방에서 찔러주는 종패스는 오차가 없었다. 공격형 미드필더 다비드 실바(맨체스터 시티)의 짧은 패스는 순식간에 수비벽을 허물었다. 상대의 패스 축구에 중원과 수비가 유린당했다. 더 이상 해법은 없었다.

부상의 그늘에 갇혀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전한 기성용(셀틱)은 혀를 내둘렀다. 무결점의 스페인 축구에 반했다. 같은 포지션의 알론소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는 경기 직후 트위터를 통해 '알론소의 플레이, 그의 패스는 놀랍다. 알론소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최고'라고 소감을 전했다. 비록 적으로 맞닥뜨린 상대지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을 앞둔 최강희호의 첫 성적표는 우울했다. 31일(이하 한국시각) 중립지역인 스위스 베른 스타드 드 스위스에서 벌어진 평가전에서 1대4로 완패했다. 상대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한국 31위), 세계 최강 스페인이었다.

최강희 A대표팀 감독은 당초 결과에 대해선 마음을 비웠다. 평가전은 평가전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너무 집중하다 보면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결과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경기 내용을 통해 실리만 챙기면 된다.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도전하는 최강희호의 시계는 9일 카타르와의
2014년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1차전에 맞춰져 있다.

그러나 한국 축구는 후퇴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2년 전 2010년 남아공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스페인과 대결(0대1 패)할 때와 비교하면 수준 차는 현격했다. A대표팀에서 은퇴한 박지성(맨유)과 부상에서 막 회복한 이청용(볼턴), 병역 논란에 휩싸인 박주영(아스널)의 공백은 컸다. 결장한 기성용과 김정우(전북)의 빈자리도 눈에 보였다. 결국 그라운드에는 리더가 없었다.

투지와 끈끈한 조직력을 앞세운 한국 축구 특유의 스타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기력했다. 카타르전까지 열흘 밖에 남지 않았다. 최 감독은 경기 후 "오늘 경기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남은 기간 최고의 조합을 찾고 선수들의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관건"이라고 밝혔다. 꼬인 실타래를 어떻게 푸느냐는 최 감독의 몫이다.

숙제는 산적하다. 중도에 사령탑이 교체됐고, 최 감독의 스타일은 또 다르다. 훈련시간이 짧았다. 2월 브라질월드컵 3차예선 최종전 쿠웨이트전(2대0 승)과 비교해 선수들의 면면도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실전에선 구차한 변명일 수 있다. 이같은 경기력이면 월드컵 본선행이 결코 쉽지 않다.


조직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급선무다. 수비라인은 어떤 식으로든 재정비해야 한다. 중앙수비인 이정수(알 사드)와 조용형(알 라얀)의 호흡은 낙제점이었다. 배후를 침투하는 상대 선수를 번번이 놓치며 위기를 초래했다. 핸드볼 파울로 페널티킥을 헌납한 조용형의 수비 자세는 큰 문제다. 아시아챔피언스리그 16강 출전으로 결장한 주장 곽태휘(울산)가 돌아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뿌리가 튼튼해야 미드필드와 공격이 탄력을 받는다.

중원의 경기 운용 능력과 스트라이커 부재도 개선해야 한다. 구자철(볼프스부르크)과 김두현(경찰청)이 '더블 볼란치(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에 섰고, 바로 위에 남태희(레퀴야) 손흥민(함부르크) 염기훈(경찰청)이 포진했다. 중원에서 중심을 잡지 못했다. 몇 차례 위력적인 침투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패스의 질이 떨어졌다. 상대의 강한 압박에 허둥지둥했다. 위기 대처 능력은 기대 이하였다. 개개인이 섬이었다. 다른 생각을 갖고 플레이를 했다.

원톱에는 지동원(선덜랜드)과 이동국(전북)이 번갈아 포진했지만 존재감이 없었다. 위치 선정에 실패했고, 파괴력과 무게감도 없었다. 스스로 고립됐다. 골에 대한 집념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두현의 중거리포로 영패를 모면한 것이 오히려 선물이었다.

자취를 감춘 세련된 압박도 보완해야 한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더라도 2~3명이 에워싸면 위압감을 느낀다. 실수를 유발할 수 있다. 뒤이어 볼이 가는 루트를 차단하는 제2의 압박이 필요하다. 스페인은 느슨한 듯 했지만 필요할 때 거친 압박을 가하며 최강희호를 무력화시켰다. 태극전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카타르전은 최종예선의 첫 단추다. 원정이라 변수가 많다. 세계최강 스페인전 패배에 너무 실망할 필요도 없지만, 그 교훈을 잊어서도 안된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

:) 당신이 좋아할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