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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시위에도 덤덤…술·담배 대신 긍정에너지로 스트레스 극복
KIA 타격코치로 활동하던 2월 13일 호주 스프링캠프 현장에서 갑작스럽게 지휘봉을 잡았고 이후 수많은 풍파와 위기를 이겨내고 호랑이 군단을 한국시리즈(KS) 왕좌로 이끌었다.
처음 사령탑이 됐을 땐 적은 나이 탓에 '경험이 적고 준비가 덜 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범호 감독은 주변의 편견과 걱정을 씻어내고 우승팀 리더로 우뚝 섰다.
이범호 감독은 어떻게 취임 약 9개월 만에 우승 감독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이 감독은 7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옥을 찾아 '올 시즌 KIA에 가장 중요했던 7번의 순간'을 복기하며 1년을 되돌아봤다.
◇ 3월 23일 개막전, 역사가 시작된 날
이범호 감독은 부임 39일 만에 사령탑 데뷔전을 치렀다. 광주 기아챔피언스파크에서 열린 키움 히어로즈와 2024시즌 개막전이었다.
당시 KIA는 접전 끝에 7-5로 승리하며 기분 좋은 출발을 알렸다.
단순한 1승이 아니었다.
KIA는 2018년부터 2023년까지 이어진 개막전 6연패를 끊어냈다.
이범호 감독은 "부임 후 첫 경기였고, 이전까지 매년 개막전에서 패했던 징크스가 있었기에 긴장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감독은 "당시 경기가 매진됐는데, 이는 내 은퇴식 경기(2019년 7월 13일) 이후 첫 홈 경기 매진 사례였다"며 "팬들이 얼마나 큰 기대를 하고, 얼마나 큰 응원을 보내주시는지 알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 감독은 "선수들과 팬들을 믿고 한 시즌을 꾸려가면 분명히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던 경기"라고 덧붙였다.
◇ 6월 7일 두산전, 연장전 패배로 2위 추락했지만…긍정의 리더십으로 극복
이범호 감독은 이 경기에서 사령탑 취임 후 처음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
KIA는 5-3으로 앞선 7회말 동점을 허용했고, 연장 11회말 수비에서 이준영이 김재환에게 끝내기 몸 맞는 공을 던져 5-6으로 역전패했다.
이날 KIA는 치명적인 실책 2개를 범하고 자멸해 LG 트윈스에 1위를 내줬다.
경기 직후 이범호 감독은 팬들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소셜미디어에서도 KIA의 추락을 우려하는 글이 도배됐다.
그러나 이범호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고, KIA는 나흘 만에 1위로 복귀했다.
이범호 감독은 "9등, 10등으로 떨어진 게 아니지 않았나"라며 "사실 6월에 1, 2위 차이는 큰 의미가 없다고 봤다"고 떠올렸다.
이어 "전체적으로 선수단이 지친 상황이었기 때문에 위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다만 허무하게 패했을 때 선수들의 자신감을 지켜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라고 강조했다.
이 감독은 "선수단 분위기 수습에 집중했고 이 패배로 좌절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범호 감독은 일희일비하지 않는 뚝심 있는 지도자다.
나쁜 기억은 바로 잊어버리고 미래를 생각한다.
스트레스도 잘 받지 않는 편이다.
이범호 감독은 "아버지를 닮아 술·담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감독의 긍정적인 사고는 KIA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됐다.
◇ 6월 29일 우천 취소…하늘이 도운 KIA
KIA는 6월 25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끔찍한 악몽을 꿨다. 14-1로 앞서다가 계투진이 줄줄이 무너지며 15-15로 겨우 비겼다.
프로야구사에 남을 만한 졸전이었다.
내상은 컸다. KIA는 26일과 27일 롯데에 거푸 졌고 28일 키움전에서도 6-17로 완패했다.
최악의 분위기였다.
이때 단비가 내렸다. 29일 키움전은 우천 취소됐고 30일 열릴 예정이었던 키움과 더블헤더 경기도 모두 비로 쓸려갔다.
KIA는 회복할 시간을 벌어 투수진을 재정비해 다시 질주했다.
이범호 감독은 "우승은 하늘이 점지해준다고 한다"며 "올해 KIA는 비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감독의 말마따나 KIA는 삼성 라이온즈와 KS 1차전에서도 0-1로 밀리던 6회 무사 1, 2루에서 우천 서스펜디드 선언이 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범호 감독은 "어느 팀이든 정규시즌에 몇 번의 큰 위기가 찾아온다"며 "큰 위기가 왔을 때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한 해 농사가 갈릴 수 있는데, 변수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감독은 겸손해야 한다"고 했다.
이범호 감독은 9-5로 앞서던 5회초 2사 1, 2루에서 선발 투수 양현종을 김대유로 교체했다.
승리투수 요건에 아웃카운트 1개를 남기고 마운드를 떠난 양현종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현역 최다승 투수이자 팀의 아이콘인 양현종으로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범호 감독은 팀을 위해 과감하게 결단했다.
눈길을 끈 건 이범호 감독의 다음 행동이었다. 화가 나 있는 양현종에게 다가가 '백허그'로 그를 위로했다.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스스럼없이 스킨십하는 모습은 큰 화제가 됐다.
이범호 감독은 "지도자라면 유망주 육성은 물론 고참급 선수들과 관계와 팀 융화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며 "(양)현종이도 경기가 끝난 뒤 '제가 내려오기 전에 막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안 좋은 상황이 나온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감독의 마음을 이해해줘서 참 고마웠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이 감독은 유망주 육성에 힘을 쓰면서 베테랑 선수들을 하나로 녹여냈다.
최고참 최형우의 활약도 이범호 감독의 노력 없이는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 7월 31일 두산전 6-30 참사…최다실점 불명예와 바꾼 '투수 지키기'
KIA는 두산과 홈 경기에서 무려 28개의 피안타, 4피홈런, 14사사구를 내주며 30실점 했다.
1997년 5월 삼성이 LG를 상대로 기록했던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27점)이 27년 만에 깨졌다.
KIA로선 창피하고 불명예스러운 기록이었다. 그러나 이범호 감독은 고개를 떨구지 않았다.
9회초 마지막 수비에서는 투수 대신 외야수 박정우를 마운드에 올렸다.
비난을 감수한 조처였다.
이범호 감독은 "우승에 도전하는 팀은 이기는 경기가 많기 때문에 필승조의 체력 부하가 타팀보다 심하다"라며 "이 경기를 치른 때는 지독한 무더위에 우리 팀 필승조 투수들의 체력이 크게 떨어져 있던 시기"라고 했다.
이 감독은 "계속 안타를 맞고 실점했지만, 우린 내일 경기도 해야 했다"며 "내겐 최다 실점 기록보다 선수들의 몸 상태와 앞으로의 경기가 더 중요했다"고 덧붙였다.
이 감독은 "그때 아마 트럭 시위도 펼쳐졌을 것"이라며 "그러나 그날로 다시 돌아가도 난 투수를 아끼겠다"고 말했다.
◇ 8월 16일 2위 LG에 9회 역전 드라마…'호랑이 꼬리잡기 저주'의 결정판
KIA는 올 시즌 유독 2위 팀을 만나면 높은 승률을 기록했다.
2위 팀들은 KIA와 맞대결에서 번번이 흠씬 두들겨 맞고 2위 아래로 추락할 때가 많았다.
팬들은 '호랑이 꼬리잡기의 저주'라고 불렀다.
KIA는 2위 팀과 맞대결에서 명승부를 자주 연출했다. 특히 8월 16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 방문경기가 백미로 꼽힌다.
당시 LG에 4경기 앞서던 KIA는 3연전을 모두 패하면 1경기 차로 쫓겨 선두 수성의 최대 고비를 맞을 수도 있었다.
KIA는 LG와 3연전 중 첫 경기 1-2로 뒤지던 9회초 마지막 공격에서 나성범이 LG 마무리 유영찬을 상대로 우월 역전 투런포를 터뜨리며 극적인 뒤집기 승리를 거뒀고 여세를 몰아 3연전을 싹쓸이했다.
이범호 감독은 "1차전을 못 잡았다면 2, 3차전을 내주고 추격을 허용했을 것"이라고 떠올렸다.
이 감독은 "당시 우리 팀이 0-2로 끌려가고 있었는데, 선수들에게서 역전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며 "박찬호는 (8회초) 뜬 공을 친 뒤 한참을 서 있다가 천천히 걷는 등 다들 의욕이 사라진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이범호 감독은 공수교대 때 박찬호를 라인업에서 빼버렸다. 그리고 8회말 LG 오지환 타석 때 3루심이 체크스윙 판정을 모호하게 하자 이례적으로 거칠게 항의를 했다.
계산된 행동이었다.
이범호 감독은 "항의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는데 공기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며 "선수들은 '할 수 있다'고 외쳤고, 아니나 다를까 9회 기회에서 경기를 뒤집었다"고 말했다.
◇ 10월 29일 우승 다음 날 회의 소집…짬뽕 한 그릇씩 먹고 2025시즌 시작!
KIA는 10월 28일 광주에서 삼성을 꺾고 KS 우승 트로피를 들었고 자정을 넘긴 29일 새벽 축승회장으로 이동해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이범호 감독과 코치진은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 회의실에 다시 모였다.
마무리 캠프 훈련 계획과 스토브리그 대비를 포함한 2025시즌 준비를 위해서였다.
우승의 환희와 감동, 숙취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범호 감독은 다시 출발대에 섰다.
이 감독은 "당시 코치들과 숙취 해소를 위해 짬뽕 한 그릇씩을 시켜 먹고 회의를 시작했다"며 "2025시즌은 이미 시작됐다. 오늘까지 언론 인터뷰 등 대외 활동을 한 뒤 내일 (마무리 캠프가 열리는) 일본으로 출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감독은 "팬들의 염원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다"며 "우린 지금의 위치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전진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cycle@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