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기 센 남자' 이현승 "위기 순간, 전광판을 본다" 왜?

함태수 기자

기사입력 2015-08-18 05:51


시리즈 스윕을 노리는 삼성과 연패 탈출이 절실한 두산이 2일 잠실에서 만났다. 8회 무사 만루에서 구원 등판한 이현승이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 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하고 있다. 잠실=조병관기자 rainmaker@sportschosun.com/2015.08.02/

"전광판을 보지 마라."

각 구단 코치들이 갓 프로에 들어온 신인들에게 강조하는 말이다. 그라운드에서 지켜야 할 일종의 십계명 같은 거다. 전광판 하단에는 투구 속도가 찍힌다. 경험이 적은 투수일수록, 이 속도를 궁금해 한다. 타자와의 승부에 온 신경을 쏟아야 할 상황에서 스피드에 욕심을 낸다는 얘기다.

야수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투수에게 스피드가 있다면, 타자들은 타율이 눈에 들어온다. 3할을 넘고 있느냐, 아니냐가 핵심일 테다. A 선수도 "수원 구장의 경우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모든 선수의 타율이 나온다. 나만 3할을 넘지 못하고 있다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며 "그래서 가급적 전광판을 쳐다보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산 마무리 이현승(33)은 다르다. 투구판에서 잠시 몸을 돌려 전광판을 응시하는 편이다. 코칭스태프의 주문을 어기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다른 투수들처럼 스피드를 체크하는 게 아니다. 원래 야구나 인생이나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닌 방향"이라고 믿는 그다. 올 시즌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 문구도 같은 맥락이다. "투수에게 필요한 첫 번째 덕목은 결국 제구다"라고.

정작 전광판에서 그가 유심히 지켜보는 건 상대 타자의 이름이다. 위기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는 "투구판을 밟기 전, 공을 던지기 전 타자의 '이름'을 보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고 17일 말했다. 일종의 이미지트레이닝인 셈인데, "'무조건 잡을 수 있다. 내가 이긴다'는 신념이 중요한 것 같다. 나도 떨리고 저쪽도 떨릴 때, 자신의 기량을 온전히 발휘하는 쪽이 이기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프로에 들어와 사실상 처음 마무리 임무를 맡으면서도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하고 있는 요즘이다. 팀도 이현승이 뒷문을 걸어 잠그며 몰라보게 안정됐다. 무엇보다 무사 만루에서 극강이다. 이 때 상대 중심 타선을 완벽하게 틀어막은 것만 두 번이다. 지난 7월3일 잠실 넥센전이었다. 7-7이던 연장 10회 무사 만루에서 그는 스나이더를 삼진, 박병호 3루 땅볼, 유한준은 우익수 뜬공으로 처리하며 주자의 득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지난 2일 잠실 삼성전에서도 3-1이던 8회 무사 만루에서 최형우를 삼진, 이승엽을 병살타로 처리했다. 이현승은 올해 만루에서 10타자를 상대해 1피안타 3탈삼진을 기록 중이다. 1개의 안타마저 내야 안타로 빗맞은 타구였다.

만루는 아니었지만, 15일 인천 SK전에서도 이현승의 배짱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5-4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리드. 8회부터 등판한 그는 9회 안타 2개와 내야 땅볼로 1사 1,3루 위기를 맞았다. 타석에는 LG에서 트레이드 된 정의윤. 이현승은 2구 만에 투수 앞 땅볼로 아웃 카운트를 늘렸다. 후속 타자는 이재원. 올해 1,3루에서 4할2푼9리의 맹타를 휘두른 거포였다. 하지만 이현승이 이겼다. 볼카운트 1B-2S에서 몸쪽 승부를 연거푸 펼치더니 결국 몸쪽 직구로 스탠딩 삼진 처리했다.

당시 김태형 감독은 이재원을 거를까 잠시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현승과 양의지 배터리에게 판단을 맡겼는데 역시나 평소 성격답게 바로 승부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김 감독은 "(이)현승이가 몸쪽 승부를 적극적으로 하더라. 이재원도 몸쪽 공을 노리고 있었지만 점점 더 깊숙이 파고 들었다"며 "통상 마무리 투수가 몸쪽 승부를 하는 것이 이상적이기는 한데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크다. 그런 면에서 이현승은 남다른 면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이를 두고 '기가 센 투수'라는 표현을 썼다. "최악의 경우, 이재원에게 한 방 맞았어도 벤치에서는 뭐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현승이는 마운드에 서자마자 자기가 갖고 있는 베스트 공을 뿌리니 타자를 이길 수 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그는 "중요한 것은 결국 '기'다. 특히나 불펜 투수들은 기에서 밀리면 끝이다"며 "그런 모습을 갖고 있는 마무리 투수의 공은 결코 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현승의 생각도 비슷했다. 그는 "투수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한 두 번 위기를 틀어막으면 그 잔상이 남아 다른 경기에서도 잘 던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전광판을 보면서 다음 타자가 누구인지, 그래서 지금 이 타자와 어떻게 승부해야 하는지 등 나름의 계산을 한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며 "나 때문에 다 잡은 승리를 놓칠 수 없지 않는가. 순위 싸움이 한 창인데 공 한 개 한 개에 목숨을 걸고 던지려 한다"고 밝혔다. 함태수 기자 hamts7@sportschosun.com

서울 라이벌 두산과 LG의 주중 3연전 첫 번째 경기가 9일 잠실 야구장에서 펼쳐 졌다. 올시즌 첫 등판을 멋지게 장식한 두산 이현승이 승리를 확정 지은 후 포수 양의지의 엉덩이를 장난스럽게 걷어 차고 있다.
잠실=조병관기자 rainmaker@sportschosun.com/2015.06.09/


[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news@sportschosun.com -

:) 당신이 좋아할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