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카드가 외쳤다. "영수야! 떠나도 떠난게 아냐!"
영원히 푸른 유니폼을 입을 것만 같았던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에서 이제는 한화 이글스의 일원이 된 배영수(34)를 향한 절절한 외침이다. 푸른 바탕에 하얀색 글씨로 쓰인 이 메시지는 대구 팬들이 '적'으로 고향에 돌아온 배영수를 향해 바친 헌사다. 12일 대구구장 관중석 상단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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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2015 프로야구 경기가 12일 대구구장에서 열렸다. 관중석 상단 벽에 올시즌 삼성에서 한화로 옮긴 배영수를 그리워하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다. 대구=정재근 기자 cjg@sportschosun.com/2015.0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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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배영수가 한화 이적 후 처음 정규시즌 경기를 하기 위해 내려온 날이다. 이번 3연전 기간에 배영수는 선발 예정이 있다. 이변이 없는 한 14일 경기 선발이다. 그래서인지 배영수는 이날 대구구장에 도착한 뒤 "정말 기분이 이상하네요. 어제 밤에 내려왔는데 늘 다니던 길인데도 묘한 느낌이 들어라고요"라며 고향에 돌아온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반응은 권 혁(32)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영수처럼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가 지난 겨울 스토브리그에서 FA로 이적한 뒤 이제는 한화의 필승 아이콘으로 거듭난 그다. 어쩌면 삼성 시절보다 더 큰 주목과 인기를 끌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지만, 대구구장에 온 느낌이 남다른 건 배영수와 마찬가지였다. 경기 전부터 이리저리 오가며 감회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홈라커를 쓸 때는 잘 몰랐는데, 원정 덕아웃에 와보니 대구구장이 얼마나 낡았는지 알겠네요. 다른 팀이 대구구장에서 잘 못하는 이유가 이런 거 때문이었나보네"라며 익살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늘 3루측 홈팀 덕아웃에 앉아 있다가 1루측 원정 덕아웃에 있는 게 낯선 듯 했다.
두 선수는 지난 겨울 FA로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팀내 입지가 줄어들던 권 혁의 이적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바다. 그러나 배영수마저 삼성을 떠날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많지 않다. 그럴만도 한 것이 배영수는 대표적인 '삼성맨'이었기 때문. '영원한 에이스'로 불렸다. 2000년 프로에 데뷔해 2014년을 마지막으로 팀을 떠나기까지 무려 15년간 삼성의 간판으로 활약했다.
게다가 애초부터 대구 출신이라 야구장과 인근 골목 구석구석까지 훤하다. 단골 식당도 수두룩하고, 길을 가면 알아보는 이도 넘친다. 전날에도 택시를 탔다가 "니 와 갔노"라는 무뚝뚝한 경상도 아저씨의 토라진 목소리에 '아, 고향에 내려왔구나'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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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이 친정팀 삼성을 상대로 승리투수가 됐다. 한화 이글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2015 프로야구 경기가 12일 대구구장에서 열렸다. 한화가 5-4로 앞선 9회말 권혁이 8회에 이어 등판했다. 2사 1루에서 삼성 박찬도를 좌익수 플라이로 잡으며 승리투수가 된 권혁이 환호하고 있다. 대구=정재근 기자 cjg@sportschosun.com/2015.0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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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적'으로 내려온 대구구장이 무척이나 낯선 듯 했다. 배영수는 "벌써부터 고민이 되네요. 목요일에 등판할 것 같은데, 그때가 되면 어디에 인사를 해야할 지. 당연히 대구 팬들에게 인사는 해야 할 텐데…마운드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숙여야겠어요"라고 껄껄 웃었다. 물론 권 혁도 비슷한 고민을 털어놨다. "아직도 나를 기억해주시는 삼성 팬들이 많은데, 이제는 한화팬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게 재미있네요"라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들은 프로다. 사적인 감정은 딱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만이다. 본 경기에 들어가면 애매한 감정은 한꺼번에 정리가 된다. '동료'가 아니면 '적'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후배인 권 혁이 먼저 본보기를 제대로 보여줬다. 권 혁은 이날 경기에 8회말부터 등판해 2이닝을 1안타 2볼넷 1실점으로 막아내며 승리를 따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주말 연패를 했기 때문에 오늘은 반드시 이겨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옛 동료나 과거 홈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게 정상이다. 승부에 나선 순간에는 사적인 정리는 잊는 것. 이들이 리그를 대표하는 프로로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다.
대구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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