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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오병옥씨)와 어머니(김형덕씨)는 아들(오승환)의 경기를 주로 직접 가서 보는 편이다. 마침 1일, 친지의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어 삼성의 대구 넥센전을 보러 갈 수 없었다. 아들은 바로 그날 1세이브를 추가하면서 김용수(227세이브·은퇴)를 넘어 개인최다 세이브 신기록(228)을 썼다.
오씨는 2005년 삼성에 입단 후 아들이 야구 선수로 크게 성공하면서 주변에서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다. 고액 연봉자(3억8000만원)인 아들은 용돈을 준다. 2년 전에는 대형차(에쿠스)를 선물했다. 지난해에는 세계 최연소 200세이브 기록을 세우고 구단에서 받은 고가의 가전 제품을 서울 집으로 보내왔다. 3남 중 막내 아들은 집안에 금전적으로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끌려다니지 않는다. 철저하게 스타이기 이전에 사람이 되도록 인도했다. "인사 잘 하고, 점잖게 굴고, 좀 한다고 우쭐해하지 마라"는 얘기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일까, 오승환은 프로 입단 8년 만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선수 뿐 아니라 사람 냄새 나는 '괜찮은 남자'로 성장했다.
아들 CF 나간 후 밥을 수도 없이 샀다
아버지는 아들이 초등학교(서울 대영초) 4학년 때 야구 선수를 시작한 후 아들에 올인했다. 집안 살림은 금은방을 해서 꾸렸다. 주로 아들의 야구 훈련과 경기를 보러 따라 다녔다. 그때마다 가게는 아내가 봤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학교에 내는 돈이 한번도 밀린 적은 없었다.
요즘 오씨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들 칭찬을 듣고 밥을 사는 즐거움으로 산다. 최근에 오승환은 국내 굴지 보안회사의 광고 모델로 CF를 찍었다. 오씨는 "승환이의 연기를 볼 때마다 흡족하고 기분이 좋다"면서 "그런데 생각처럼 CF가 자주 나오지 않는다. 그거 나오고 주변 사람들에게 밥을 정말 많이 샀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오씨는 아들 자랑에 인색했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아들이 성장하는데 크게 한 것이 없다고 했다. 아들에게 대부분을 믿고 맡겼을 뿐이라고 했다.
선생님의 판단을 믿었다
아버지는 "잘 키웠다는 말 보다 승환이가 잘 해서 잘 커주었다는 말이 맞다"고 했다. 오승환은 대영초 담임 교사와 도신초 야구부 감독의 추천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담임 교사의 권유를 받고 아들을 야구부가 있는 도신초로 전학시켰다. 오승환은 난생 처음 잡은 야구 글러브와 공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였다. 그후 그는 단국대 4학년, 전국 대회에서 우승할 때까지 큰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제법 빠른 공을 던졌고 장래가 기대된다는 평가를 받기는 했다. 하지만 고교(경기고) 시절 허리부상, 대학(단국대) 시절 오른팔꿈치 수술 등으로 운동을 하기 보다 병원을 더 자주 들락거렸다. 오승환과 가족이 가장 고통을 받았던 시간이었다.
오씨는 "아들에게 야구시킨 걸 후회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판단이 맞을 거라고 믿었다"면서 "그리고 난 아들을 믿었고, 지금도 많은 부분 믿는다"고 했다. 부상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운동하다보면 누구든 자주 다치게 돼 있다. 잘 될거니까 좋은 쪽으로 생각해라." 오승환은 2009년 어깨부상, 2010년 팔꿈치 수술 후 재활 치료를 했지만 오뚝이 처럼 다시 일어섰다.
아버지는 아들의 해외진출과 결혼에 대해서도 강요하지 않았다. 오씨는 "해외 진출은 나가서 성공하면 좋겠지만 그건 아들과 삼성 구단이 알아서 할 일이다. 또 결혼도 자기가 알아서 할 나이가 됐다"고 했다. 그는 "백마디 잔소리 보다 자식을 한 번 믿어주는게 낫다"고 했다. 노주환 기자 nogoo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