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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공동취재단]"제가 센강을 헤엄친 최초의 한국인입니다."
김황태는 "사전 연습 때는 유속이 느렸는데, 본 경기 때는 더 빨랐다. 첫 번째 다리 부분 유속이 굉장히 빨랐다. 그 부분을 거슬러 올라갈 때 힘들었다. 모든 영법을 써봤는데 답은 배영이었다"고 했다. 자유형과 평영에 비해 느리고, 힘도 많이 드는 배영을 많이 쓰다 보니 근육에도 무리가 갔다. 사이클과 육상 기록에도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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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씨는 "자연스럽게 보호자로 같이 지내면서 핸들러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 권유를 받았다. 같이 있으니까 심리적으로도 안정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김황태는 "24시간 같이 있으니까 하루에 열댓 번 다툴 때도 있다. 하지만 잘 되려고 하는 거니까 이해하고 화해한다"고 했다.
김황태가 사고를 당한 건 양가 상견례를 불과 한 달 앞둔 때였다. 김황태는 "서울에 있는 병원까지 아내가 오가며 나를 수발했다. 지금도 힘들고, 고맙다"고 했다. 울릉도에 사는 친구의 소개로 7년간 만난 두 사람은 끝까지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부부가 됐다. 김진희씨는 "잘 헤쳐나가는 사람이니까 둘이 같이 잘 버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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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황태의 바람은 하나다. 한국 트라이애슬론 패럴림픽의 역사가 그에서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다. "태권도 주정훈 선수가 도쿄 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뒤 선수가 많이 유입됐다. 올해 5월 대한장애인트라이애슬론연맹이 창립됐는데 아직 정가맹단체가 아니다. 나를 보면서 많은 선수들이 도전했으면 한다. 아울러 지원도 늘어났으면 한다"고 바랐다.
경기를 마친 뒤 김황태는 눈물을 보였다. 그는 "아내가 부모님이 고생하신 얘기를 하면서 울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삶이 이기적이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항상 희생했다. 2007년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는 항상 주말에 나는 집을 비웠다. 딸에게도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다. 김진희씨는 "이제는 좀 편안하게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가족과도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황태도 "패럴림픽 도전은 이번이 끝일 것 같다"며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패럴림픽 기간 내내 경기에 집중하느라 선수촌에서만 지냈다. 출국을 앞두고서야 아내와 스태프들과 함께 간단하게 파리 시내를 둘러봤다. 철인의 삶에 충실했던 지난 4년, 첫 패럴림픽 출전과 완주의 꿈을 이뤘다. "한국에 돌아가면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고 싶다"며 껄껄 웃었다. 파리=공동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