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한국 男 피겨 새 역사 쓴 차준환 4일간의 현장 기록

김성원 기자

기사입력 2016-12-11 18:50


차준환(15·휘문중)이 한국 피겨사에 새로운 족적을 남겼다. 10일 오후(현지시각) 프랑스 마르세유 팔레 옴니 스포츠에서 열린 2016~2017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프리스케이팅에서 153.70점을 받은 차준환은 이틀 전 쇼트프로그램에서 획득한 71.85점을 더해 합계 225.55점으로 동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선수가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메달을 딴 것은 2005~2006시즌 김연아의 우승 이후 무려 11년만이다. 차준환은 한국 선수로는 역대 두번째, 한국 남자 피겨로서는 사상 첫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외로웠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실수가 있었다. 마음도 비웠다. 하지만 또 다시 실수를 했다. 완전치 않았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 하늘이 도왔다. 경험을 쌓았고 더 큰 미래를 바라보게 됐다. 새 역사를 쓴 기대주 차준환의 마르세유 4일 간의 여정을 따라가봤다.


차준환(오른쪽). 사진제공=IBSPORTS
외로움

7일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팔레 옴니 스포츠에 라커룸에 들어섰다. 올 시즌 첫 그랑프리 시리즈. 파이널 무대 자체도 처음이었다. 경쟁할 상대 선수들과의 친분은 거의 없었다.

공기가 남달랐다. 차준환 자신만 빼고 나머지 5명은 모두 러시아 말로 대화를 나눴다. 4명이 러시아 국적이었다. 미국 국적의 알렉세이 크라스노존도 러시아에서 귀화한 선수였다. 차준환과 러시아 선수 5명 간의 대결이었다. 라커룸에서 차준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홀로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서서히 외로움에 익숙해졌다. 차준환은 1년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낸다. 보통 3월말 캐나다 토론토로 들어간다. 대부분의 시간을 훈련으로 보낸다. 경기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혼자와의 싸움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법을 찾아냈다. 바로 훈련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차준환은 "이제 외로움에 익숙해졌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훈련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이야기했다. 마르세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훈련에 푹 빠진 채 외로움을 잊으며 결전을 준비했다.

예상 밖 실수

8일 쇼트프로그램에 나섰다. 초조함을 느꼈다.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차준환 인생에서 가장 큰 경기였다.

원래는 지난 시즌 그랑프리 시리즈에 나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2015년 6월 부상으로 나서지 못했다. 점프 연습으로 누적된 피로가 골절로 이어졌다. 한 달 동안 깁스를 해야 했다. 그리고 시작한 재활. 고독과의 싸움이었다. 차준환도 "그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그렇게 넘어선 고통의 시간. 차준환을 강하게 단련시켰다. 복귀하자마자 그는 주니어 그랑프리 무대에서 신들린 경기를 펼쳤다. 3차 대회와 7차 대회를 석권했다. 그렇게 파이널까지 왔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미끄러지듯이 유려하게 연기를 시작했다. 초조함이 사고를 불렀다. 첫 점프에서 실수를 범했다.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컴비네이션 점프였다. 트리플 러츠 점프를 뛴 뒤 트리플 토루프를 연결하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스피드 부족 때문이었다. 71.85점. 4위. 그나마 나머지 구성요소들을 클린하며 얻은 결과였다. 경기 후 차준환은 "평소 완벽했던 컴비네이션 점프에서 실수했다. 너무나 아쉽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틀 후 프리스케이팅에 대해서는 "오늘 쇼트의 결과를 생각하지는 않겠다. 프리에서 순위나 점수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프리스케이팅 직전 차준환과 오서 코치가 악수를 하고 있다. 마르세유(프랑스)=이건 스포츠조선닷컴 기자
비 노멀

9일 차준환은 다시 링크에 섰다. 프리스케이팅 점검에 들어갔다. 전날의 아쉬움을 떨쳐내고자 노력했다. 쉽지 않았다. 아직은 15세의 어린 학생이었다.

브라이언 오서 코치가 다가왔다. 딱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비 노멀(Be normal)." 평소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흔들리던 차준환의 마음이 다시 비상할 힘을 얻었다. 평소에도 듣고, 수차례 다짐하는 말이지만 이날만큼은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차준환은 평소 집중력이 대단하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될 때도 있다. 오서 코치는 틈날 때마다 차준환에게 "경기에만 몰입되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자"고 조언해왔다. 힘을 빼면 더 좋아질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왔다. 평상시의 리듬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조용히 방안에서 지내며 휴식을 취했다. 초조함을 잊어나갔다. 그렇게 프리스케이팅을 준비했다.


차준환이 동메달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마르세유(프랑스)=이건 스포츠조선닷컴 기자
성장

10일 프리스케이팅이 시작됐다. 표정에서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경기 중 자신의 실수를 보완하는 모습도 보였다. 세번째 구성요소 차례였다. 원래는 트리플 악셀-더블 토루프 컴비네이션 점프를 해야 했다. 하지만 트리플 악셀 뒤 스케이트 날이 빙판에 박히고 말았다. 더블 토루프로 연결하지 못했다.

쇼트프로그램에서의 실수를 연상할 만큼 아쉬웠다. 하지만 실수는 차준환을 진화시켰다. 네번째 점프에서 기지를 발휘했다. 당초 트리플 악셀 단독 점프를 계획했지만 여기에 더블 토루프 점프를 붙여 컴비네이션 점프를 만들어냈다. 오서 코치도 환호했다. 경기 후 오서 코치는 "그 장면을 보면서 환호했다. 너무 자랑스러웠다"고 기뻐했다.

여전히 그는 배움의 과정에 있는 소년 선수였다. 이후 점프를 계속 성공시켰다. 차준환 본인도 살짝 자신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시 실수가 찾아왔다. 트리플 플립-싱글루프-트리플살코 컴비네이션 점프였다. 첫 트리플 플립을 뛰고난 뒤 두개의 점프를 연결하지 못했다. 153.70점. 합계 225.55점을 기록했다.


현지팬들이 차준환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있다. 마르세유(프랑스)=이건 스포츠조선닷컴 기자
해피 '앤딩'

경기 직후 차준환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취재진을 만났다. "또 실수했다. 너무 아쉽다"며 침울해했다. "그래도 큰 경험이 됐다.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겠다"며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려 애써 노력했다. 그래도 아쉬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30분이 흘렀다. 첫번째로 나섰던 차준환의 메달권 진입을 위해서는 5번째 선수이 성적이 중요했다. 로만 사보신. 차준환과 동메달을 다투던 선수였다. 그는 프리스케이팅에 2번의 쿼드러플 토루프 점프를 넣었다. 하지만 두 점프 모두 회전수 부족 판정을 받았다. 71.63점. 차준환의 승리였다.

기자회견장에서 또 다시 차준환을 만났다. 동메달 획득에 대해 축하를 건넸다. 그때까지만 해도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잘 웃지도 않았다.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에서 연이어 나온 실수에 여전히 마음이 빼앗겨 있었다. 차준환의 소속사 관계자들과 취재진들이 '메달 획득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그제서야 그는 살짝 웃었다.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더 좋은 선수가 되겠다"고 했다.

시상식을 마쳤다. 숙소로 향하기 위해 경기장을 나서려고 했다. 이미 나가는 문 앞에는 프랑스 소녀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차준환이 나오자 다들 프로그램 책자를 내밀었다. 차준환 소개 페이지에 사인을 받으려고 했다. 사진도 많이 찍었다. 차준환의 실력 그리고 외모가 소녀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차준환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 사인을 마치고선 후다닥 밖으로 달려갔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활짝 웃었다. 한국 피겨의 미래 차준환의 쾌거. 해피엔딩(happy ending)이 아닌 해피 '앤딩(anding)'이었다. 마르세유(프랑스)=이건 스포츠조선닷컴 기자 bbadagu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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