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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인터뷰]하석주 감독의 멕시코전"20년전 상처 나하나로 족하다"

전영지 기자

기사입력 2018-06-22 05:32


아주대학교 하석주 감독이 수원 아주대 축구부 숙소에서 스포츠조선과 인터뷰를 가졌다. 1998년 프랑스?d드컵 당시 대표팀에서 착용했던 17번 유니폼을 보여주고 있는 하석주 감독. 송정헌 기자 songs@sportschosun.com/2018.05.31/

"CF를 찍으면서 멕시코전을 20년만에 처음으로 다시 봤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다. 상처는 나 하나로 족하다."

하석주 아주대 감독(50)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20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자신의 상처를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새옹지마일까, 전화위복일까, 러시아월드컵 멕시코전을 앞두고 하 감독은 각 방송사 섭외 1순위다. 2018년 러시아에서 신태용호가 멕시코와 20년만에 재회하게 된 탓이다. CF 모델로도 데뷔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멕시코전, 지옥과 천당을 오갔던 그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멕시코 스낵 나초를 '아그작' 씹어먹는 모습이 통쾌하다. 하 감독이 24일 0시(한국시각) 열릴 러시아월드컵 F조 조별예선, 멕시코와의 2차전을 앞두고,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야 할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상처를 기꺼이 열어보였다.


아주대학교 하석주 감독이 수원 아주대 축구부 숙소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포즈를 취했다. 아주대 감독실 서가에는 2000년 한일전 결승골 사진이 놓여 있었다. 송정헌 기자 songs@sportschosun.com/2018.05.31/
1998년 백태클 트라우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팬들이 기억하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멕시코전(1대3패)은 전반 28분 하석주의 짜릿한 프리킥 선제골, 3분 뒤인 전반 31분 하석주의 백태클, 그리고 레드카드다. 하석주가 뛰지 않은 2차전에서 강호 네덜란드에 0대5로 대패하며 차범근 감독이 중도하차했다. 3차전 벨기에전, 하석주의 필사적인 크로스에 이은 유상철의 동점골로 1대1로 비겼다.

하 감독이 기억하는 멕시코전은 적막을 깨고 울린 가슴 시린 3번의 함성 뿐이다. "3경기 결과만 기억할 뿐 아무도 그 사이사이의 아픔은 모른다"고 했다. "퇴장 후 지하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프로까지 통틀어 생애 첫 퇴장, 모두 내 탓이라는 죄책감으로 혼자 텅빈 방에서 '최소한 비기게만 해주세요'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후반 3번의 큰 함성이 들렸다. 1대2, 1대3, 불안감이 엄습해오는데 동료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오더라." 하석주는 이후 말을 잃었다. "밥도 못 먹겠고, 사람들도 못 만나겠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빵 조각에 줄을 달아 숙소 뒤 호수에 낚싯줄을 드리웠다. 낚싯줄에 잉어가 달려 올라오는데 눈을 껌뻑껌뻑하는 게 불쌍하더라. '너나나나 똑같은 인생이다.' 낚시도 못하겠더라. 네덜란드전은 부상한 황선홍과 함께 관중석에서 봤다. 0대5로 지고 감독님이 경질되니까,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았다.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생각에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았다."

2경기 출전정지 징계가 극적으로 감경되며 마지막 벨기에전에 나섰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다.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국민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줘야 한다'는 각오로 다같이 이를 악물었다. 솔직히 나는 경기장을 나가는 게 무서웠다. 퇴장 이후 상대와 몸을 스치는 것도 무서웠다. 지금도 그 경기는 기억이 잘 안난다. 그저 사력을 다했다. 이마 깨지고 붕대 투혼에… 후반 내 프리킥을 유상철이 넣으면서 1대1이 됐다. 어시스트를 했는데도 하나도 기분 좋지 않았다. 경기후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다 쓰러졌던 기억만 난다."

월드컵 트라우마는 한동안 지속됐다. "일본 소속팀 세레소 오사카에 복귀한 후에도 아파트에 틀어박혀 있었다. 대인기피증도 생겼다. 대표팀 은퇴는 물론 축구계 은퇴까지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하 감독은 2000년 4월 26일 한일전(1대0승)에서 통렬한 왼발 중거리포로 결승골을 터뜨리며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었다. "2000년 잠실에서 한일전이 열렸다. 10만 관중이 몰렸다. 자신이 너무 없었다. 2년이 흘렀는데도 너무 힘들었다. 절박했다. 두 달 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하늘을 향해 원망 섞인 간절한 기도를 했다. '아버지, 내가 한번도 부탁 안 했으니 오늘 딱 한번만 도와달라고, 너무 부담 되고 죽을 것처럼 힘들다고.' 하늘이 날 버리구나 생각하는 순간 기회가 왔다. 윤정환의 패스를 이어받아 아웃프런트로 날린 슈팅이 만화처럼 일본 수비수를 비껴 골망으로 빨려들어갔다. 지금도 미스터리다. 내 기도가 너무 절박해서 하늘이 도와줬다고 생각한다."





차범근 감독님, 그리고 멕시코전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하 감독의 상처는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차범근 전 감독을 향한 마음의 빚은 1998년에 머물러 있다. 차 감독은 하석주의 왼발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사랑했던 사령탑이다. "차 감독님이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큰 용기가 됐다. '하석주 왼발은 끝내줘. 역대 최고야, 임팩트가 좋고 간결해. 석주처럼 스피드와 지구력을 타고난 선수는 많지 않아.' 감독님의 칭찬에 날아갈 것 같았다." 1997년 하석주는 A매치에서 세트피스로만 2골 6도움을 기록하며 기대에 부응했다. 그러나 월드컵 사상 첫 선제골, '번쩍' 하던 황홀한 순간은 너무도 짧았다. 한 순간에 '죄인'이 됐다. "1998년 그날 이후 감독님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사의 한 획을 그은 분인데… 그 일 이후 죄송해서 숨어 다닌다. 내겐 지금도 엊그제 일 같다.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팬들의 비난은 감수했는데, 감독님이 하차하신 것은… 너무 큰 죄를 지은 것 같아서… 지금도 상처로 생각하고 있다고 꼭 전해달라."

하 감독은 자신과 같은 아픔을 2018년의 러시아월드컵 후배들 만큼은 겪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날의 백태클 퇴장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쨌든 그 과정을 만든 것은 내 잘못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후배들에겐 절대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월드컵 퇴장, 실수에 대한 팬들의 비난은 어마어마하다. 감당하기 힘들다. 그 상처는 나 하나로 족하다."

스웨덴전 첫 패배가 더욱 가슴 아픈 이유다. VAR, 퇴장에 대한 경각심을 수차례 강조했다. "11년간 국가대표(95경기 23골)로 헌신했고, A매치 6경기 연속골 기록도 세웠다. 하지만 1998년 월드컵 때문에 가슴 아픈 일이 많았다. 나를 보면서 우리 후배들이 경각심을 가지길 바란다"고 했다.

멕시코전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멕시코는 자국리그가 강력하다. 개인기, 스피드가 좋다. 공격성향이 강하고 끈끈한 팀이지만, 기복이 있다. 다혈질이다. 강한 압박을 통해 심리전을 유도해야 한다. 쉽지 않은 경기지만, 후배들이 선배들의 아쉬움을 꼭 설욕해주면 좋겠다"고 바랐다. 희망의 축구를 응원했다. "월드컵으로 인해 스타, 영웅도 나오지만 좌절하고 상처 받는 선수도 나온다. 하지만 팬들은 나 같은 사람도 용서했다. 팬들은 무기력한 모습을 싫어하지, 최선을 다한 플레이에는 언제든 박수 쳐줄 준비가 돼 있다. 무기력하지 않게, 더 절박하게, 마지막까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축구를 해달라. 후회 없는 경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돌아오면 좋겠다."
아주대(수원)=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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