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리 온나~ 와서 몸 풀어야제~"
|
'현대스리가'로 불리는 현대중공업 사내 축구대회는 '일반 조기축구 대회'와는 규모와 수준에서 차원이 다르다. 참가팀만 193개에 등록선수 숫자만 5000여명. 1부리그부터 3부리그까지 자체 승강제를 실시할 정도다. 각급 리그 결승전이 열릴 때마다 동료 직원 뿐만 아니라 가족, 지인들까지 출동해 뜨거운 응원전을 펼치는 터라 승리에 대한 선수들의 열망이 남다르다. 심지어 일부 부서에선 비시즌 기간 휴가를 활용해 특별 전지훈련을 다녀올 정도. 프로 선수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을 천금같은 기회를 외면할 리 없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되도록 성적이 저조했던 팀에게 기회를 주고자 참가팀을 엄선했는데 서로 참가를 하겠다고 하는 통에 진땀을 뺐을 정도"라며 웃었다. 이 소식을 접한 윤 감독과 이정협의 얼굴은 금세 사색이 된다. 윤 감독은 "프로 선수들과 유소년을 지도해 본 게 전부인데 아마추어 직장인 선수들께 제대로 도움을 드릴 수 있을 지 모르겠다"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매 순간 '진지남' 이정협의 표정은 더 굳어있다. "지도자 데뷔 첫 날부터 너무 어려운 숙제를 받았다."
|
하지만 우려도 잠시. 탄성이 그라운드에 퍼진다.
훈련을 진행하던 윤 감독과 이정협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추어 사내 축구팀'치고는 볼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던 모양이다. 감독인 김기정 힘센엔진조립부 팀장(42)은 "2014년 1부리그 우승 뒤 지난해 2연패를 노렸는데 주축 선수들이 일본 출장을 가는 바람에 16강에서 탈락했다"며 "팀원들 모두 오늘 제대로 배워서 우승하자는 생각이다. 업무도 평소보다 한 시간 빨리 마치고 다들 모였다"며 미소를 지었다.
|
잠깐의 휴식시간. 진지하던 훈련장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다. "빨리 나온나~ 내도 감독님하고 사진 함 찍어도~", "이정협 선수~ 사진 좀 같이 찍을 수 있을까예~" 어느덧 얼굴에 굵은 땀이 맺힌 윤 감독과 이정협도 기꺼이 포즈를 취하며 즐거운 시간을 만끽한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팀 윤정환'과 '팀 이정협'의 20분 연습경기. 시작부터 불꽃이 튀었다. 이정협이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 "훈련 때는 우리 감독님이셨지만 지금은 같은 그라운드에 지도자로 나란히 서 있다. 이기고 싶다." 호탕하게 껄껄 웃던 윤 감독의 눈이 이내 날카로워진다. "이것도 연습이지만 꼭 이겨주겠다." 호기롭기만 하던 윤 감독. 하지만 이내 '청탁성' 설명이 이어진다. "사실 팀 훈련 때 (구)본상이에게 발목을 차였는데 아직도 아프다. (이)정협이가 또 차면 정말 아플 것 같다(웃음)."
승부가 시작되자 윤 감독의 '엄살'은 곧 자취를 감췄다. 20분 내내 그라운드를 분주히 오가면서 제자들에게 '택배 패스'를 연발했다. 현역시절 '컴퓨터 플레이메이커'로 불리던 그 시절을 떠올릴 만하다. 윤 감독의 맹활약 속에 두 골을 얻은 '팀 윤정환'이 '팀 이정협'을 2대0으로 눌렀다. 승부는 갈렸지만 환한 웃음 속에 그라운드를 질주했던 선수들과 응원했던 직원들 모두 한마음 속에 승자가 된 순간이었다.
|
약속된 1시간 30분의 짧은 시간이 흘러 이제는 헤어질 시간. 모두가 야속한 눈치다. 하지만 헤어짐의 아쉬움을 웃음으로 대신한다. 김 팀장은 "참가하기 전까지만 해도 팀원들의 반응이 반반이었는데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다"며 "오늘을 계기로 현장 직원들과 '현대'를 대표하는 울산 현대 구단이 더욱 돈독해지는 시간이 됐다. 경기장에도 꼭 응원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K리그 챌린지(2부리그) 대전에서 활약 중인 김동찬과 친구이기도 한 고영민 힘센엔진조립부 기사(31)는 "현역시절부터 윤 감독님의 팬이었는데 바쁜 시즌 중임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잊지 못할 추억을 얻었다"고 기뻐했다.
윤 감독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축구를 통한 재능기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정협은 "아버지나 삼촌, 친구뻘 되시는 직원 분들을 지도하는 게 굉장히 어색할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편하게 대해주셔서 새로운 에너지를 받았다"며 환하게 웃었다.
프로와 아마 사이의 엄연한 경계선은 함께 흘리는 땀방울 속에서 희미해지다 결국 사라지고 만다. '축구'라는 매개를 통해 진정 하나가 된 이들은 우리 이웃의 형, 동생, 친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울산=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