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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고(영국)=이건 스포츠조선닷컴 기자]파랑과 초록이 극명하게 나뉘었다. 서로 경계를 넘지 않았다. 파랑과 초록이 뒤섞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피치뿐이었다. 22개의 파랑과 초록이 서로 뒤엉키고 넘어질 때마다 그 뒤에 있는 파랑 무리와 초록 무리의 희비가 엇갈렸다. 엄청난 환호, 뒤이어 엄습하는 더 큰 야유. 몇 차례 상반되는 파도가 몰아치자 이곳이 어디인 줄 실감할 수 있었다. 17일 영국 아니 좀 더 실제적으로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햄던파크. 레인저스와 셀틱이 펼치는 2015~2016시즌 스코티시컵 4강전, 402번째 올드펌더비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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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중립경기였다. 리그에서는 한쪽의 홈에서 경기가 열린다. 원정팬들은 열세일 수 밖에 없다. 이번은 중립경기다. 양팀 선수도 11명 대 11명. 팬들 역시 2만5000명 대 2만5000명. 똑같은 조건에서 붙는 진검승부였다.
레인저스 팬들은 비장했다. 레인저스 팬들 입구은 파랑의 물결이었다. 당연히 초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들 '우리가 돌아왔다(we are back)'는 문구가 적힌 머플러를 하고 있었다. 한쪽 편에는 레인저스의 깃발을 잔뜩 가져온 강성 서포터들이 있었다. 기자가 멀리서 사진을 찍자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기도 했다. 경찰들은 레인저스 서포터들이 가져온 깃발을 하나하나 다 펴보면서 안전 점검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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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안은 전쟁이었다. 5만석 규모의 햄던파크를 양 팀 팬들이 정확하게 양분하고 있었다. 팬들 사이 중간 지대에는 경찰들이 서있었다. 기마경찰부터 시작해 경찰견까지 있었다. 글래스고 경찰 대부분이 등장한 듯 했다. 시위 진압을 위해 중무장을 한 경찰들도 있었다. 일촉즉발의 사태에 대비, 긴장한 표정과 매서운 눈빛으로 파랑과 초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랑의 승리였다. 레인저스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셀틱을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투지 그리고 그에 따른 행운이 만든 승리였다. 레인저스는 객관적인 전력에서 셀틱보다 한 수 아래였다. 하지만 투지를 앞세웠다. 뛰고 또 뛰었다. 강하게 셀틱을 압박했다. 첫 골은 행운이 따랐다. 전반 16분 골문 앞에서 볼이 셀틱 수비수 맞고 케니 밀러 앞으로 흘렀다.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에서 밀러가 가볍게 골을 넣었다. 백전 노장 밀러는 2006~2007시즌을 셀틱에서 주전으로 뛰었다. 2007~2008시즌 초반 잉글랜드 더비 카운티로 이적한 뒤 다음시즌 레인저스로 갔다. 셀틱 팬들에게는 배신자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셀틱팬들에게는 뼈아픈 실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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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차기도 올드펌더비다웠다. 셀틱의 진영에서 열렸다. 실축과 선방이 이어졌다. 7번키커까지 갔다. 셀틱의 마지막 키커 톰 로지치의 슛이 글래스고 하늘을 갈랐다. 마지막이었다. 레인저스가 5-4로 승리했다.
경기는 끝났다. 레인저스 팬들은 선수들과 함께 승리를 만끽했다. 최근 올드펌더비 2연패를 끊는 소중한 승리였다. 반면 셀틱팬들은 멍하니 경기장에 서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한쪽은 드높은 기쁨. 반대편은 깊은 슬픔. 120분 열정의 피치 위 전쟁은 오로지 두 감정만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