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코로나19로 많은 변수를 겪어야만 했던 지난해 충무로.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원석 같은 작품들이 올해 청룡영화상에서 파격적인 이변과 반전을 연출했다.
올해 청룡영화상은 2019년 10월 11일부터 2020년 10월 29일까지 극장에 개봉한 174편의 영화를 대상으로 한국영화기자협회회원, 평론가, 영화 제작자 및 배급사, 영화배우 소속의 매니지먼트사 등 약 200여명의 영화 관계자 설문을 거쳐 각 후보별 5명의 후보자(작)를 엄선했다.
그 결과 22편의 작품과 10인의 감독, 그리고 30인의 배우들이 후보에 올랐다.
제41회 청룡영화상이 9일 인천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렸다. 남우주연상 유아인, 여우주연상 라미란, 남우조연상 박정민, 여우조연상 이솜, 신인남우상 유태오, 신인여우상 강말금, 인기스타상 정유미가 포즈를 취하고있다. 인천=송정헌 기자 songs@sportschosun.com/2021.02.09/
청룡영화상의 심사위원들은 검증된 전문가 8명으로 구성되며 그해 후보자(작)와 무관한 영화감독 2명(김홍선·민규동), 영화 제작자 2명(곽신애·원동연), 영화 전문 교수 및 평론가 2명(윤성은·조혜정), 배우 1명(최수종), 본지기자 1명(민창기) 등 총 8명으로 구성됐다. 작품의 대중성 부문을 반영하기 위해 네티즌 투표(1표)를 더하고 전문가와 일반 관객의 괴리감을 줄인 총 9표를 통해 그해 최고의 영화와 배우를 선정했다.
무엇보다 국내 최고 권위를 가진 청룡영화상은 매회 시상식이 끝난 뒤 심사위원들의 심사평과 심사표를 공개해 투명하고 공정한 시상식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심사는 청룡영화상 시상식 당일인 지난 9일 오후 2시 시작해 약 4시간의 심사위원 격론 끝에 영광의 수상자가 탄생했다. 심사위원들은 수상 결과 유출을 방지하고자 휴대전화를 모두 반납하고 후보자(작)에 대한 갑론을박과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 이날의 주인공을 신중하게 선택했다. 과연 수상자는 어떤 심사평을 받았는지, 또 아쉽게 수상이 불발된 스타는 누구인지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한다.
제41회 청룡영화상이 9일 오후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렸다. 신인상을 수상하고 있는 유태오. 인천=송정헌 기자 songs@sportschosun.com/2021.02.09/
제41회 청룡영화상이 9일 오후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렸다. 신인여우상을 수상하고 있는 강말금. 인천=송정헌 기자 songs@sportschosun.com/2021.02.09/
오래 갈고 닦은 최고령 원석, 신인상
올해 청룡영화상 신인상 부문은 베테랑 중고 신인과 발전 가능성이 높은 원석들의 대결 양상으로 나뉘었다. 그 어느 해보다 심사위원들을 고민하게 만든 신인상 부문은 심사 중 가장 오랜 격론 끝에 신인남우상으로 '버티고'의 유태오, 신인여우상으로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강말금, 신인감독상으로 '소리도 없이'의 홍의정 감독이 선정됐다.
먼저 신인남우상을 수상한 유태오는 2009년 개봉한 영화 '여배우들'을 통해 데뷔, 오랜 무명의 시간을 겪고 뒤늦게 빛을 본 중고 신인이다. 특히 '버티고'에서 유태오는 완벽한 배경과 달리 감춰야만 했던 성 소수자의 아픔을 진정성 있는 연기로 표현해 심사위원으로부터 "정형적인 연기 톤이 아니었다. 평범한 캐릭터를 색다르게 표현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배우 중 하나다. 신인은 괴물 같은 연기력을 선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태오는 신인만의 매력과 특유의 섹시함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앞으로의 가능성을 받을 때 무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신인여우상을 꿰찬 또 다른 중고 신인은 만 42세 강말금이다. 강말금은 지난해 '양자물리학'의 박해수를 꺾고 청룡 역사상 최고령 신인상 수상자로 기록을 세웠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절묘한 생활 연기의 매력을 200% 살리며 관객의 마음을 빼앗은 강말금은 집도, 남자도 없고 일마저 끊겨 버린 찬실의 '웃픈' 상황을 비극과 희극의 절묘한 연기로 표현해 신인여우상을 차지했다. 심사위원들은 "올해 신인여우상은 누가 받아도 아깝지 않은 원석들의 경합이었다. 그 중 강말금은 힘주지 않고 리얼한 연기를 잘 소화했다.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해 관객을 사로잡은 특유의 매력이 있다"고 심사 이유를 전했다.
패기의 신인감독들 역시 격론이 상당했다. 재기발랄하고 파격적인 신인 감독들의 작품 중 가장 주목을 받은 작품은 '소리도 없이'의 홍의정 감독이다. 기존의 범죄물의 틀을 깬 새로운 스토리와 전개, 명배우들의 열연을 더해 극악무도한 사건을 일상적인 톤으로 담아낸 홍의정 감독의 '소리도 없이'는 올해 청룡영화상에서도 과감함의 진가를 인정받았다. 심사위원들은 "신인 감독은 도발적으로 자신만의 연출 세계를 보여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존의 질서와 다른 파격적인 작품이 바로 '소리도 없이'였다. 신인감독이 아니면 감히 보여줄 수 없는 과감함과 도발적인 연출이 가득하다. 주변의 영화인들에게 지난해 가장 인상적인 신인 감독을 물었을 때 모두가 홍의정 감독을 꼽았다. 어떤 이들은 '질투가 날 정도로 연출을 잘했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마치 '여자 장준환 감독'의 느낌이다"고 극찬했다.
제4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이 9일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렸다.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박정민이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인천=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2021.02.09/
제4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이 9일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렸다.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이솜이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인천=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2021.02.09/
10년 만에 첫 만장일치, 조연상
매년 누가 받아도 이견 없는 명배우들의 대격돌로 심사위원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부문인 조연상도 새로운 기록에 세워졌다. 주·조연을 가리지 않는 충무로 기대주 박정민과 이솜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 된 것. 중년 '신 스틸러'의 독주와 같았던 조연상 부문은 30대의 '믿보배'들을 통해 세대교체에 성공했다.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박정민은 충무로 캐스팅 0순위, 대세 중의 대세로 손꼽히는 지금 가장 핫한 30대 배우다. 2016년 열린 제37회 청룡영화상에서 '동주'로 신인남우상을 꿰찬 그는 5년 만에 조연상 트로피까지 거머쥐며 트리플 크라운에 성큼 다가갔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인남(황정민)의 조력자 유이를 연기한 박정민은 작품에서 베일에 싸인 파격적인 히든카드였다. 성 정체성을 찾기 위해 태국으로 넘어간 트랜스젠터를 표현한 박정민은 등장부터 엔딩까지 그야말로 신을 통째로 집어삼킨 치트키였던 것. 심사위원들은 "박정민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저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모든 장면에서 다 나오길 바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보통 트랜스젠더 역할은 독립영화에서 많이 소비되는 캐릭터 중 하나로 과장된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그런 부담스러운 캐릭터를 박정민은 너무 사랑스럽고 유머러스하게 잘 표현했다. 주연 못지않은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쟁쟁한 베테랑 배우들이 총출동한 여우조연상은 만장일치로 이솜이 차지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삼진전자 마케팅부의 숨은 아이디어 뱅크 유나를 연기한 이솜은 1995년의 상고 출신 말단 직원 유나에게 유니폼으로도 가릴 수 없는 멋과 개성을 부여하는 한편, 돌직구성 현실 직시와 어렵지만 친구가 가고자 하는 길을 함께 하는 진한 우정을 동시에 선보였다. 올해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이솜은 2010년 열린 제31회 청룡영화상에서 만장일치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하녀') 이후 무려 10년 만에 만장일치 득표를 받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심사위원들은 "모델 출신 배우로 주로 작은 규모의 영화에 많이 출연했는데 매 작품 성장을 거듭하다 이번 작품에서는 완전히 캐릭터를 잘 깎아 보여준 배우가 됐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는 너무 자연스럽고 편안하면서 자신만의 매력을 제대로 표출했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캐릭터를 자신과 일체화해 가지고 놀았다"고 호평했다.
제4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이 9일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렸다.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유아인이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인천=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2021.02.09/
제41회 청룡영화상이 9일 오후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렸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있는 라미란. 인천=송정헌 기자 songs@sportschosun.com/2021.02.09/
원톱 코미디 장르 최초, 주연상
청룡영화상의 메인 무대 중 하나인 주연상은 올해도 충무로의 톱스타들이 대거 출동해 경합을 벌였고 반전의 반전을 거듭해 남우주연상으로 '소리도 없이'의 유아인이, 여우주연상으로는 '정직한 후보'의 라미란이 왕관을 쓰게 됐다.
2015년 열린 제36회 청룡영화상에서 '사도'로 데뷔 이래 첫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유아인은 6년 만에 두 번째 남우주연상을 차지하며 당대 최고의 스타임을 입증했다. 지난해 최고의 문제작으로 떠오른 '소리도 없이'에서 범죄 조직의 소리 없는 청소부 태인을 연기한 유아인은 필모그래피 최초 대사 없는 연기와 삭발 투혼, 15kg의 체중 증량까지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한 것은 물론 유괴한 소녀를 향한 불안함과 연민을 섬세한 눈빛과 세밀한 몸짓으로 표현하며 새로운 '인생 캐릭터'를 경신했다. 심사위원들은 "유아인은 연기 천재다. '소리도 없이'는 유아인이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유아인의 행보가 마음에 든다. 상업적인 작품뿐만 아니라 실험적인 작품을 선택하면서 유의미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오히려 부르짖는 연기를 하지 않을 때 더욱 진가가 빛나는 배우로 이번 작품에서 완전 무장 해제된 모습이 압도적이었다"고 박수를 보냈다.
유의미한 족적을 남긴 건 유아인뿐만이 아니다. 올해 청룡영화상 수상 결과 중 가장 반전을 안긴 주인공으로 등극한 여우주연상의 라미란도 심사위원들의 뜨거운 지지가 이어졌다. 라미란은 '정직한 후보'에서 대한민국 넘버 원 거짓말쟁이에서 한순간에 팩트만 말하는 진실의 주둥이를 갖게 된 국회의원 주상숙을 연기했다. 전 세대가 사랑하는 대체 불가 배우이자 충무로 대표 '코미디 장인'으로 정평이 난 라미란은 '정직한 후보'에서 적재적소 코미디는 기본, 완벽한 캐릭터 싱크로율까지 전천후 활약을 펼쳤고 그 결과 청룡영화상 역사 최초로 여성이 주도한 원톱 정통 코미디로 주연상을 수상해 파란을 일으켰다. 심사위원들은 "'정직한 후보'의 코미디는 아무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주상숙 역할을 떠올렸을 때 다른 배우가 떠오르지 않는 대체 불가한 배우다. 충무로의 여성 영화 기근이 계속되고 있는데 라미란은 여배우로서 코미디 영화 원톱으로 나선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한국 영화는 코미디 영화를 너무 소외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라미란이 그런 대목에 일침을 가한 경우다. 어떤 여배우도 소화할 수 없는 연기를 라미란이 해냈다"고 설명했다.
제4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이 9일 오후 인천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렸다. 감독상을 수상한 임대형 감독이 소감을 말하고 있다. 인천=정재근 기자 cjg@sportschosun.com/2021.02.09/
제4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이 9일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렸다.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남산의 부장들. 인천=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2021.02.09/
멜로 장인X충무로 미다스의 손, 감독 및 최우수작품상
유독 힘들었던 지난해 극장가 속에서도 쉬지 않고 관객에게 여운을 남긴 'K-무비'. 올해 청룡영화상은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선사한 감성 멜로 '윤희에게'의 임대형 감독과 역사책을 찢고 나온 듯한 명품 시대극 '남산의 부장들'에게 최고의 영예인 감독상과 최우수작품상을 안겼다.
2019년 11월 개봉해 지금까지 관객의 가슴에 여운을 남긴 감성 멜로로 사랑받는 작품 '윤희에게'는 따뜻하고 섬세한 연출, 첫사랑을 추억하게 만드는 스토리와 설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영상미로 한국판 '캐롤'로 불리며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임대형 감독은 전매특허인 서정적인 연출을 '윤희에게' 쏟아내며 올해 청룡영화상의 갱상에 이어 감독상까지 2관왕을 거머쥐었다. 임대형 감독은 2007년 '행복'의 허진호 감독에 이어 멜로 장르로 14년 만의 감독상 수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심사위원들은 "감독상은 논쟁이 있더라도 감독이라는 아티스트가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 관객에게 화두를 던지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심사 평가를 가졌을 때 '윤희에게' 김대형 감독은 완벽히 부합하는 감독상 수상자다. 그 어떤 작품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에 쏟아냈다. 임대형 감독의 감성은 특별했다"고 평했다.
청룡영화상의 하이라이트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제2의 권력자라 불리던 중앙정보부장이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사건을 벌이기 전 40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10·26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지난해 1월 설날 개봉해 475만 관객을 동원했다. '남산의 부장들'은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의 면밀한 심리 묘사를 파고들며 쫀쫀한 범죄 심리극을 완성해 2020년 가장 많은 관객수를 동원한 흥행작으로 거듭났다. 무엇보다 '남산의 부장들'을 연출한 하이브미디어코프의 김원국 대표는 2015년 개봉한 영화 '내부자들'로 제37회 청룡영화상 작품상을 수상한 데 이어 '남산의 부장들'로 두 번째 청룡을 거머쥐며 충무로 '미다스의 손'임을 인정받았다. 심사위원들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는데 '남산의 부장들'은 스토리를 탄탄히 잡아내며 최고의 앙상블을 완성했다. 연기부터 연출, 미장센까지 모든 조합이 완벽했다"고 밝혔다.
◇청룡영화상 심사위원(가나다순) :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 김홍선 감독, 민규동 감독, 민창기 스포츠조선 편집국장,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 윤성은 평론가, 조혜정 중앙대 교수, 배우 최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