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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벽에 부딪힌 고아라의 좌절이 뼈아픈 현실을 짚어냈다.
재판도 완벽한 정의를 이루기엔 한계가 있었다. 가슴 털 부장 성희롱 재판 당시 결정적 진술을 했던 증인 김다인이 내부고발자로 찍혀 회사로부터 억울한 해고를 당한 것. 회사는 여론을 의식해 광고1팀을 해체하고 실질적인 자회사를 설립했다. 김다인과 인턴 직원을 제외한 전 직원을 재취직시키고 광고1팀의 물량을 자회사로 돌렸다. 심지어 가슴 털 부장 임광규까지 취직을 시켰다. 피해자와 용기를 낸 내부고발자만 피해를 본 상황이었지만 회사 측은 오히려 김다인의 사생활을 비난하며 인사 규정의 요건은 물론 노조 협의까지 갖춘 정당한 해고라고 맞섰다. '민사 44부'는 김다인을 구제하려 노력했지만, 절차적으로 완벽했고 자회사와의 연관성을 입증할 수 없도록 철저히 분리했기에 결국 김다인은 패소했다.
법마저도 무력해지는 냉철한 현실 앞에 박차오름의 고민은 깊어졌다. 김다인 사건을 언론에 알려 복수하겠다는 박차오름과 "추악한 인간이 있다고 똑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나 자신을 지키고 싶다"는 임바른의 대립은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려운 딜레마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판사 되지 말 걸 그랬다. 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없는 줄 알았다면 죽도록 공부할 필요 없었다"는 박차오름의 후회는 뼈아픈 현실의 무력함을 그려냈기에 절절하게 와 닿았다.
'미스 함무라비' 표 하이퍼리얼리즘은 부당함으로 얼룩진 사회를 제대로 짚어냈다. 내부고발자의 정의는 손가락질 받고 가해자는 교묘하게 법과 사회적 책임을 피해가는 모습은 지금도 만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축소판이었다. "악당으로 살기 참 쉬운 세상이다. 공범자가 득실거리니까. (정의의)여신이 왜 눈을 가리고 있는지 알겠다. 사람들의 더러운 꼴을 보고 있으면 저 칼로 다 쓸어버리고 싶으니까"라는 박차오름의 생생한 분노는 '미스 함무라비'가 그린 차가운 현실과 맞닿으며 시청자들의 씁쓸한 공감을 자아냈다.
법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박차오름은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슈퍼 히로인도 아니다. 그래서 사회를 꿰뚫어 보는 '미스 함무라비'의 시선과 박차오름의 성장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시청자들에게 묵직한 공감과 진한 여운을 남겼다. '미스 함무라비'는 뼈아픈 현실의 이야기로 문을 열며 더 깊은 공감의 2막을 예고했다. 차가운 현실 앞, 뜨거운 고찰은 미생 판사 박차오름이 찾아낼 '새로운 답'이 무엇일지 기대를 높인다.
본드 소년 사건을 맡게 된 민사44부의 모습이 그려질 '미스 함무라비' 11회는 오늘(26일) 밤 11시 JTBC에서 방송된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