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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서 꽃 핀 박기원 감독의 '자율배구'-믿음이 창단 첫 챔프전 우승 비결이었다

박찬준 기자

기사입력 2018-04-02 05:20


대한항공이 2017-2018 프로배구 V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대한항공과 현대캐피탈의 남자부 챔피언결정 4차전이 30일 오후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렸다. 대한항공이 승리하며 시리즈전적 3승 1패로 챔피언에 올랐다. 대한항공 선수들이 박기원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 인천=정재근 기자 cjg@sportschosun.com/2018.03.30/

사상 첫 우승을 확정짓고 TV인터뷰 앞에선 박기원 대한항공 감독(67)은 여러차례 말문이 막혔다. 울컥거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수차례 말을 끊었다.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참으려는 그 모습은 언제나 당당한 박 감독 다웠다. 그래서 더 감동스러웠다. 마음 속으로 흘린 노감독의 눈물, 그 안에는 오랜 세월 회환이 섞여 있었다.

박 감독은 최고의 커리어를 갖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선수생활을 한 박 감독은 지도자로도 화려한 길을 걸었다. 이탈리아 프로팀을 이끌었고, 이란대표팀도 지도했다. 이란에서 박 감독의 인기는 거스 히딩크 감독과 비슷할 정도. 하지만 V리그와는 인연이 없었다. 오랜 외국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2007년 LIG손해보험(현 KB손해보험) 사령탑으로 부임하지만, 박 감독은 연이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며 2010년 2월 자진사퇴를 택했다.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성과를 쌓았지만, 여전히 V리그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 V리그에 40대 감독 열풍이 불며 더는 없을거라 생각했던 기회는 2016년 대한항공이 손을 내밀며 극적으로 찾아왔다. 박 감독은 이렇게 출사표를 던졌다. "실패가 두려우면 감독을 그만해야 하지 않겠나. 한국에서 내 배구인생의 마지막 퍼즐을 맞출 기회라 생각했다. 이 기회를 어떻게든 놓치지 않겠다."

대한항공은 늘 최고의 멤버를 갖고도 정상 문턱에서 무너졌다. 이런 팀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박 감독에게도 어려운 미션이었다. '나약한 정신력', '한선수 고집' 등 대한항공을 둘러싼 오해와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지난 시즌 트라이아웃 1순위에서 가스파리니를 뽑으며 최고의 기회를 잡았지만, 결과는 또 다시 준우승이었다. 하지만 박 감독은 그럴수록 선수들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박 감독의 배구스타일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자율배구'다. 선수들 스스로 최상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끄는데 초점을 맞춘다. 당연히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다. "우승의 원동력은 간절함과 믿음이었다. 지난 시즌 챔프전 준우승하고 나서 올 시즌 어려울 때 포기가 아닌 믿음이 생겼다. 나도 선수들 믿었고, 선수들도 나를 믿었다. 그 믿음이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그렇다고 무작정 선수들에게만 맡기는 것이 아니다. 선수 개인별 특성과 성격까지 고려해 서브와 리시브 공식을 만들어 훈련하게 만든다. 그 중 하나가 서브 강도 향상이었다. 국내 세터들의 수준이 올라가 서브부터 상대 리시브라인을 흔들지 못하면 블로커들이 막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드시 강서브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체력 향상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박 감독은 지난 시즌 챔피언결정전 패배한 원인으로 체력을 꼽았다. 박 감독은 선수들의 유연성 향상을 돕기 위해 체조 전담 트레이너 영입을 제안했고 웨이트 트레이닝장 개선을 요청했다.


대한항공이 2017-2018 프로배구 V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대한항공과 현대캐피탈의 남자부 챔피언결정 4차전이 30일 오후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렸다. 대한항공이 승리하며 시리즈전적 3승 1패로 챔피언에 올랐다.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인천=정재근 기자 cjg@sportschosun.com/2018.03.30/

2017-2018 프로배구 V리그 대한항공과 현대캐피탈의 남자부 챔피언결정 4차전이 30일 오후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렸다. 대한항공이 득점에 성공하자 박기원 감독과 코치들이 기뻐하고 있다.
인천=정재근 기자 cjg@sportschosun.com/2018.03.30/
이 계획에 독단적인 판단은 없었다. 박 감독은 "감독이 팀을 운영하다 보면 오판을 하게 될 때가 있다. 팀이 부진해지고 불안해진다. 그것을 하지 않으려고 코치들과 오전 8시30분에 1차 미팅을 한다. 그래서 오진이 덜 난 편이다. 당근과 채찍을 사용할 때도 있었다. 힘든 때도 있었다. 긍정적인 면으로 돌아선 것이 우승 원동력이었다"고 설명했다. 납득할 만한 변화에 베테랑들 역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따랐다.

선수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박 감독의 최대 장점은 권위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일을 선수들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수행한다. 선수들과 소통하기 위해 메신저 사용법은 이미 일찌감치 배웠고 선수들의 사생활까지 파악하고 있다. 슬하에 자식이 없는 박 감독은 선수들의 아이들을 예뻐하기로 유명하다. 이런 감독의 소소한 노력에 선수들도 마음을 열었다.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는 강한 믿음이 형성돼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한선수였다. 한선수는 V리그 최고의 세터로 평가받지만 유독 큰 경기에서 자주 무너졌다. 박 감독은 "한선수는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차이가 난다. 한선수는 외로운 선수였다. 밖에선 과대평가 돼 있었다. 굉장히 외롭고 남한테 묻지도 못했다. 자기의 열정은 팀에서 인정도 안해주더라. 그래서 한선수에 대해 특별히 신경을 많이 썼다"고 했다. 한선수는 챔피언결정전 MVP로 그 믿음에 보답했다.

유독 힘든 올 시즌이었다. 세터 한선수가 흔들렸고 '히든카드' 김학민이 좀처럼 터지지 않았다. 3라운드까지 3위를 유지했지만 현대캐피탈, 삼성화재와의 격차를 좀처럼 줄이지 못했다. 심지어 4라운드에선 한국전력에 밀려 4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5라운드에서 3위로 올라서며 가까스로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냈다. 포스트시즌, 대한항공을 우승후보로 꼽는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박 감독은 자신감이 넘쳤다. 삼성화재와 만난 플레이오프, 1차전 패배에도 불구하고 내리 두판을 잡으며 챔피언결정전에 올랐다. 8%의 기적을 썼지만 박 감독은 덤덤했다. 진짜 무대는 챔피언결정전이었다. 박 감독은 미디어데이에서 "같은 실수를 2~3번 반복하면 바보"라는 말로 각오를 대신했다. 또 다시 무너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1차전에서 아쉽게 패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들었다. 내리 3연승을 차지한 박 감독은 마침내 자신의 배구 인생 마지막 퍼즐을 채웠다.


박 감독은 이번 우승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즐겼던 술과 담배도 끊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하루종일 배구 생각만 했다. 아침잠 한번 푹 자는게 소원이라던 그는 이제서야 두다리를 쭉 뻗고 누울 수 있게 됐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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