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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도 했으니까, 너희들도 할 수 있어!"
초등학교 때 척수를 다친 그는 한체대에서 특수체육교육을 전공한 후 2017년 임용고사에 합격, 특수교사가 됐다. 첫 부임지인 경기도 광주 탄벌중에서 대학 시절 '체전 메달리스트'의 경험을 살려 체육시간, 휠체어육상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2019년 전국장애학생체전 땐 제자들을 이끌고 출전도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휠체어 레이싱을 펼치다 선생님의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잠시 잊었던 선수의 꿈이 되살아났다. '휠체어육상 국대 레전드' 박정호 감독(안산시장애인체육회), '후배 에이스' 박윤재와 함께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재능을 알아본 박 감독의 권유로 지난해 다시 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아예 박 감독과 박윤재의 안산 집으로 이사까지 감행했다. 말 그대로 '한솥밥 식구'가 됐다. 집 근처 안산교육지원청 특수교육센터에서 근무하며 낮엔 일하고 밤엔 달리는 선생님의 '이중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윤경찬은 "특수교육지원센터에서 오전에 순회교육을 하고 오후에 돌아와 행정일을 하고 퇴근 후 6시 반부터 8시10분까지 안산 와~스타디움 트랙을 달린다"고 하루 일과를 소개했다. 아이들의 롤모델이 되고자 매순간 일도, 운동도 최선을 다해온 휠체어 레이서, '특수쌤'의 이색 이력이 알려지며 그는 체전 기간 내내 화제의 중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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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남자계주 400m는 명불허전이었다. 윤경찬은 경기, 서울, 경북 등 3개팀이 출전한 계주에서 3위였던 팀을 순식간에 58초34, 1위로 골인시키는 대역전 드라마를 썼다. 윤경찬은 "이기학, 백 경 등 나이 많은 선배님들과 훈련하며 많은 걸 배웠다. 경기 전 감독님께서 '형님들께 금메달 걸어드리자'고 하셨고, 제게 최종주자를 맡기셨다.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고 그 순간을 돌아봤다. "3위로 바통을 이어받은 후 경북 (유)병훈이형을 잡았고, '서울, (김)도윤아 기다려, 형이 간다' '내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죽기살기로 달렸다"며 웃었다. 박 감독은 "'미친 질주'였다. 경찬이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후 저를 향해 손을 뻗으며 함께 소리를 지르는데 소름이 돋았다"며 기적의 순간을 떠올렸다. "2006년 울산체전 때 내가 포스터 모델이었다. 선수로서 같한 추억을 지닌 이곳에서 좋은 후배들과 기적의 레이스를 만들게 돼 기쁘고 감사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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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운동 사이 '밸런스'를 찾으며 인생은 더욱 풍성해졌다. 윤경찬은 "운동과 일을 병행하다보니 1분1초가 소중하다. 직장서도 더 몰입하게 된다. 공무원으로서 품위를 유지하면서, 주위의 배려가 헛되지 않게 더 잘해야 한다는 다짐도 새기게 된다"고 말했다. 주위를 향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한체대 친구, 직장 동료들이 많은 응원을 해준다. 홍정표 안산교육지원청 교육장님을 비롯해 교육국장님, 초등교육지원 과장님, 장학사님, 동료 선생님들이 늘 응원해주시고 빈자리를 메워준다"고 했다. "이번 체전도, 작년 프랑스 국제대회 출전도 장학사님, 팀장님이 '걱정말라, 집중하라' 지지해주고, 동료들의 아낌없는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고개 숙였다. 윤경찬은 '중장거리 막내 에이스' 박윤재에게도 고마움을 표했다. "(박)윤재가 이번 대회를 앞두고 자신의 새 휠체어를 기꺼이 빌려줬다. 저녁 훈련 때마다 함께 앞에서 끌어주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해줬다. 내 MVP 뒤에 숨은 공신은 바로 윤재"라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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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찬 선생님의 마음은 언제나 제자들을 향해 있다. "6년간 특수학급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 한 50명 된다. 우리 아이들이 거침없이 도전할 수 있도록 나도 계속 도전하면서 새 길을 열어주고 싶다"는 의지를 전했다.그리고 인터뷰를 마치며 이 한마디를 남겼다. "봐, 선생님도 했으니까 너희들도 할 수 있어."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