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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애프터스토리]'일류선수' 아니라는 박상영은 '초일류선수'였다

전영지 기자

기사입력 2018-08-20 13:29


19일 오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컨벤션 센터에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펜싱 에페 결승전이 열렸다. 박상영이 무릎 부상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자카르타(인도네시아)=김경민 기자 kyungmin@sportschosun.com /2018.08.19/

"저는 아직 일류선수가 아니에요. 좀더 큰 선수가 되기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해야죠."

19일(한국시각)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컨벤션센터(JCC)에서 열린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남자에페 개인전 결승에서 부상투혼 끝에 값진 은메달을 목에 건 박상영(22·울산광역시청)의 한마디가 귀에 꽂혔다. '세계랭킹 3위' 박상영은 경남체고 재학 당시 주니어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따며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혔고, 스물한 살에 첫 출전한 리우올림픽에서 "할 수 있다" 주문을 외우며 기적처럼 역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세계, 전종목을 통틀어 약관 스무살에 '올림픽 챔피언'의 커리어를 지닌 선수가 몇이나 있을까.

다리를 절뚝이는 '투혼의 펜서'에게 "'일류선수'가 아니라고 말해서 놀랐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저는 사실 리우올림픽 금메달 말고는 그리 좋은 커리어의 선수가 아니다"라며 자신을 낮췄었다. 박상영이 답했다. "실제 국민들이나 펜싱을 모르는 분들은 잘 모르실 수도 있다. 우리 펜싱선수들은 1년에 올림픽, 아시안게임 같은 국제경기를 12번씩 뛴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낀다. 많이 지고 많이 이기는데 거기서 느끼는 감정들이 내가 아직 '일류선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스스로 아직 많이 부족한 선수라고 느낀다. 선배 형들과 12살 차이가 나는데 농담처럼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그 말은 선배들에 비해 제가 아직은 단단해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박상영은 대표팀에서 '띠동갑' 선배들을 통해 배우고 성장해왔다. 리우올림픽 금메달은 그저 과거일 뿐. 런던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정진선, 세계선수권 은메달리스트 박경두 등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20년 꾸준히 정상을 지켜온 대선배들을 보며 그는 한없이 자신을 낮췄다.


19일 오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컨벤션 센터에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펜싱 시상식 열렸다. 시상식에서 남자 펜싱 에페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한국 박상영이 금메달리스트 카자흐스탄 알렉사닌과 장난치고 있다.
자카르타(인도네시아)=김경민 기자 kyungmin@sportschosun.com /2018.08.19/
이날 드미트리 알렉사닌(카자흐스탄)과의 결승전에서 박상영은 펜싱 인생에서 가장 힘든 전쟁을 치렀다. 1-4로 뒤지던 1피리어드 초반 박상영이 무릎을 잡고 피스트에 쓰러졌다. 오른다리 왼다리를 번갈아가며 근육경련은 멈추지 않았고 스코어는 3-9까지 벌어졌다. "계속 다리를 절잖아." 관중석이 술렁였다. 기권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절뚝이면서도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종료 14초전 12-13, 1점 차까지 따라붙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상대에게 2연속 득점을 허용하며 은메달을 따냈다. '할 수 있다'의 아이콘, 박상영은 "너무 아파서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본능적으로 쏟아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박상영은 "솔직히 들었었다"고 고백했다. "몸이 너무 무거웠다. 국민들의 관심이나 주위의 시선 같은 것보다는, 4년에 한번 있는, 내 개인적으로 중요하고 큰 시합이었다. 그냥 이렇게 지기는 싫었다"고 차마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유를 전했다.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면서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성적에 대한 조급함이 있었다. 마지막에 그걸 해소하지 못했다. 그걸 해소해야 더 큰 선수가 될 수 있을 것같다"고 말했다.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은 간절한 꿈이었다. '아시아 징크스'를 넘고 싶었다. 유럽 강호들을 줄줄이 물리쳐온 박상영은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개인전 메달이 없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그래서 올림픽 만큼이나 큰 도전이었다.

죽을 것같았던 부상도, 올림픽 챔피언의 부담감도 핑계삼지 않았다.'부상'이야기가 나오자 "부상 때문에 진 것이 아니다. 부상이랑 메달은 아무 관계가 없었다. 진 선수는 어떤 말을 하든 다 핑계다. 그 선수가 워낙 잘했다. 실력 대 실력으로 졌다. 몸 상태 때문에 졌다고 하면 이긴 선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긴 자에 대한 존중을 잊지 않았다. '부담감이 많았을 것같다'고 하자 "지고 나서 부담감 때문에 졌다고 말하는 것같아서…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상세히 말씀드리겠다"며 말을 아꼈다.


대화 도중 박상영이 갑자기 무릎을 감싸쥐었다. "아… 또 쥐가 나네요." 시상식 후까지도 근육 경련은 멈추지 않았다. 트레이너가 달려왔다. 급히 아이싱 처치를 받고, 셔틀버스를 향해 절뚝절뚝 걸어가는 '펜싱청년'의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단언컨대, 선수의 품격은 승리가 아닌 실패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다. 쓰라린 패배를 기꺼이 받아안는 법을 아는 그는 '일류'가 아닌 '초일류 선수'였다.
자카르타=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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