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에 육박하는 한국 복싱 역사에서 유명 복서를 가장 많이 배출한 사설체육관 경흥체육관을 오늘 '복싱 히스토리' 코너에서 소개해 볼까 합니다.
경흥체육관은 서울 동대문구에 있었는데, 당시 지역 텃세가 극심한 제기동 경동시장에서 노조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폭넓은 인간관계와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강두원 씨(작고)가 주도적으로 기획하여 73년 자신의 울타리인 경동시장 내에 독자적으로 설립한 사설 체육관이었죠. 관장은 자신의 친구이자 당시 동서울체육관 관장인 윤창수 씨를 선임하고 중산체육관에서 복서로 활동하던 전도유망한 친동생 강흥원을 이곳으로 이적시키면서 개관, 경동시장과 강흥원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 경흥체육관이라 명명했습니다. 윤창수 관장과 김남수 사범이 이룬 환상적인 투톱 콤비의 체계적인 트레이닝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룬 덕분에 우수한 선수들이 대거 쏟아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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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흥체육관은 복싱사관학교인 한국체대에 김인창, 장흥민, 김종신, 장한곤, 김종원 등 1회부터 5회까지 연속해서 진학시키는 등 명실상부한 최고의 체육관으로 손색이 없었죠. 여담이지만 한국체대는 76년 12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레슬링의 양정모와 체육관계자들이 청와대에 모여서 박정희 대통령과 환담하는 자리에서 태동했답니다. "차후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겠느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체육관계자들이 "고교 유망주들을 체계적으로 지도 육성할 수 있는 체육대를 설립해서 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 대비해야 한다"고 화답했죠. 그리고는 박정희 대통령 특유의 불도저식 지시에 따라 이듬해인 77년 3월 13개 종목, 120명을 선발하여 전격적으로 실행에 옮기면서 최초의 국립대학인 한국체대가 탄생했던 것이죠. 이런 스포츠 명문 한국체대에 우수한 자원을 양성하여 5년 연속 쉼 없이 진학시킨 과정도 간과할 수 없는 사설체육관의 우수성이죠. 특히 이곳 체육관 운영은 경동시장 상인회에서 물심양면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하면서 선수들이 무념무상으로 복싱에만 전력투구할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한 것이 명문 체육관으로 발돋움하는 데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다고 하네요.
78년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일어난 비화가 생각납니다. 당시 경흥체육관 출신의 황철순과 김인창 두 선수가 대표로 선발되어 현지에서 룸메이트로 지냈는데, 김주석을 꺾고 대표팀에 발탁된 한국체대 1학년 황충재가 찾아와 학교에서 선후배 관계가 힘든 상태이니 동국대로 옮기고 싶다고 하소연하자 이듬해 황철순이 황충재를 모교인 동국대로 편입할 수 있게 오작교 역할을 해준 것입니다. 황충재는 79년 동국대로 편입하면서 전격적으로 프로행을 선언했죠. 두 사람은 같은 '창원 황씨'였기에 형제 같은 사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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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공산권과 대립각을 세우던 서방세계에서 '모스크바올림픽 보이콧'을 강행했고, 더불어 한국도 불참하게 되었죠. 이에 따라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세계에서는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은 국가들을 위한 대체올림픽인 '골든컵대회'를 케냐에서 개최했는데 이 대회에서 김인창은 미국, 서독, 필리핀, 케냐 선수들과 진검승부를 벌여 4전승(2KO승)을 장식, 한국팀 유일의 금메달을 목에 걸며 주목을 받았고, 이어진 LA시장배까지 석권하며 80년에 강력한 라이벌 야구의 최동원을 제치고 감격의 '대한체육회 최우수선수상'에 이은 '대한민국 경기부문 체육대상'을 차지해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죠.
황철순은 경흥체육관 출신의 독보적인 스타플레이어죠. 그의 경력은 화려하다 못해 눈부실 정도로 출중했습니다. 74년, 78년 두 차례 아시안게임에 출전, 금과 은을 목에 걸었고, 80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에선 최우수복서로 뽑히기도 했죠. 한국 밴텀급 역사에서 송순천, 문성길과 비견될 정도로 테크닉이 뛰어난 복서였으며, 몬트리올올림픽 16강에서 72년 뭔헨올림픽 당시 알폰소 자모라(멕시코)를 꺾고 우승한 마르티네스(쿠바)를 제압하며 돌풍을 일으킨 세계적인 복서이기도 했습니다. 배구선수인 그의 아내 정순옥 또한 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유경화, 조혜정, 이순옥 등과 함께 동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올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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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민은 82년 한국체대 졸업 당시 우수선수로 선정되어 '병역특례 혜택'을 받은 복서로, 85년 안동공고 교사로 근무하다 작년에 명예퇴직했죠. 장흥민은 한국체대 1학년 때인 78년 제2회 김명복 박사배 라이트플라이급에서 우승과 함께 최우수상을 받았는데 그때 우승상금이 50만 원이었습니다. 79년엔 전년도 대학 무대 3관왕이자 대통령배 최우수복서인 조종득과 전국체전에서 맞붙어 2회 RSC승을 거두며 우승하는 등 라이트플라이급에서는 무적이었지만, 오인석과 함께 국제대회에서는 메달이 전혀 없는 '유이한' 선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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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수라는 걸출한 선수에게 6연패를 당하는 등 13전 1승 2무 10패(4KO패)를 기록한 배형환이란 복서는 선수로선 족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필자가 생각하기론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대표적인 복서 출신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맡은 분야에서 입지를 굳혔죠. '원예무역의 대부'로 불리는 배형환은 사업이 활발할 때는 대만으로 출퇴근할 정도로 분주하게 뛰었고, 지금도 1년에 절반 이상은 해외에 체류할 정도라고 하네요. 은퇴 후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한 배형환은 4개 국어에 능통하고 스페인 등 해외에서 추진하는 사업 확장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농림부장관상' 대상을 받았을 만큼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매김했으며, 복서들의 선망 대상이 되었죠. 지금 경흥체육관은 황성옛터처럼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됐지만, 그 체육관에서 활동하던 복서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들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듯해 흐뭇합니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