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국군체육부대 이 훈 감독(51)과 통화를 할 때면 20년 전 필자가 서울체고 재직 시절 리라공고 코치로 근무했던 이 감독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날들이 회상됩니다.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고 코치는 잘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스포츠계 속설처럼 위태로움 속에서도 처절한 사투를 벌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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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체육부대 감독으로도 지난해 전국종별선수권대회에서 3체급 석권과 아울러 최우수 지도자상을 받는 등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아마복싱 부활의 상징이 되어 좋은 재목을 많이 배출하길 기대합니다. 이 감독 얘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변정일 생각이 나는군요.
오늘의 주인공은 국군체육부대 이 훈 감독과 강동고 동문으로, 천하의 명장 황철순 관장 휘하에서 성장해 국가대표와 세계챔피언을 지낸 변정일(53)입니다. 변정일은 차분하고 내성적인 성품으로 예의가 바른 외유내강의 전형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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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최문석 관장이 운영하는 체육관에서 복싱에 입문, 수업을 받던 중 최 관장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체육관이 사라지자 서울에 있는 당시 김태식 챔프가 활약하던 원진체육관으로 옮깁니다. 변정일은 이 체육관에서 프로에 데뷔하기 위해 프로테스트를 받지만 3차례나 연속해서 탈락하는 쓰라림을 맛봅니다. 마치 82년도에 서울대에 수석 입학한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운전면허시험을 3수 만에 간신히 합격한 사실에 비견될 정도로 미스터리한 일이었죠. 사실 프로테스트는 웬만한 기본기만 갖춘 평범한 복서라면 무리 없이 통과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변정일은 무려 3차례나 브레이크가 걸리고 만 것입니다.
변정일이 일반 복서와 다른 점은 이런 시련을 극복하고 절치부심 훈련에 몰입, 83년 윤석재라는 가명으로 서울신인대회와 전국신인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주소가 서울로 전입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편법을 써 출전했던 것이죠. 이후 빅스타체육관장인 복싱계 마당발 유연수씨가 복싱계 마키아벨리 황철순 관장에게 변정일을 소개하면서 변정일은 이듬해 동료들보다 2년 늦게 고교에 진학, 복싱에 눈을 뜹니다.
'나무는 큰나무 덕을 보지 못하지만, 사람은 큰사람 덕을 본다'는 옛말처럼 황철순은 큰 거목이었고, 변정일은 그 거목의 그늘 밑에서 많은 혜택을 받으며 무럭무럭 성장합니다. 물론 변정일은 기본 체력이 출중했고 테크닉이 좋은 전형적인 사우스포였지만, 구슬도 닦아야 빛이 난다고 황철순이라는 세공사에 의해 변정일이라는 원석은 값비싼 보석으로 거듭난 것이죠.
당시 황철순 사단에는 두 명의 지도자가 포진되어 있었는데 리라공고의 조종득 코치, 강동고의 권채오 코치였죠. 리라공고에는 최석만, 조인주, 이창환, 박기홍, 양철민 등이 소속되어 있었고, 강동고에는 변정일을 포함하여 후에 동양챔프에 등극하는 권창재와 이 훈 등이 동문수학, 학원스포츠를 평정하며 황철순 사단의 핵심멤버로 성장합니다. 만일 변정일 복싱 역사에서 황철순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의 복싱 인생은 재만 남기고 말없이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모닥불처럼 허무한 흔적만 남았을 거란 추측을 해봅니다.
변정일은 아마복싱에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황철순 사단의 일원으로 경기에 참가, 숱한 고비를 넘깁니다. 85년 서울월드컵 1차 선발전 플라이급 준결승과 결승에서 각각 성광배(한국체대)와 박제석(웅비)과, 86년 전국체전 밴텀급 준결승에서는 민영천(충남)과, 88년 서울올림픽 선발전에서는 서정수(인천)와 초접전을 벌였지만, 스승 황철순이 내려준 동아줄을 붙잡고 극적으로 일어서면서 서울올림픽에 승선하는 쾌거를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변정일이 서울올림픽 밴텀급 2회전에서 흐리스토프(불가리아)에게 1ㅡ4로 판정패한 후 무려 67분간 링을 점거하면서 경기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죠. 당시 심판장이 불가리아 사람인 체체프였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심판장은 심판 배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죠. 변정일의 입장에선 충분히 억울함이 생길 만한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변정일은 선배 김광선과 90년에 나란히 프로로 전향합니다.
김광선은 서울올림픽 금메달과 서울컵 최우수선수상은 물론 3대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인 월드컵을 2차례나 석권하는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무려 9차례나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이에 상응하는 계약금 1억 원을 받고 프로에 진출했죠. 김광선은 당시 세계적인 복서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월드컵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허영모에게 연달아 이긴 무스타 포프(불가리아)를 소련의 에스자노프가 제압했는데, 김광선이 그 에스자노프를 두 차례나 꺾었던 거죠.
그런 프리미엄을 업고 매스컴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며 화려하게 프로에 입성한 김광선에 반해 변정일은 87년 테머컵대회 은메달과 서울컵 동메달이 전부일 정도로 경력이 일천하고 초라했죠. 계약금도 김광선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두 사람은 패티킴의 히트곡 제목처럼 '빛과 그리고 그림자'였습니다. 그들은 동국대 선후배지간이자 같은 프로모션 화랑 소속이었지만, 필자의 기억으로는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링의 세계도 우리네 인생처럼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듯이 물레방아처럼 돌고 도는 것 같네요. 프로에 데뷔한 김광선은 92년 6월 단 6전(5전승 4KO) 만에 WBC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곤잘레스(멕시코)에게 12회 역전 KO패를 당했고, 변정일은 93년 3월 9전(8전승 4KO) 만에 WBC 밴텀급 타이틀에 도전해 보란듯이 챔피언 라바날레스(멕시코)를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누르고 챔피언에 등극했죠. 김광선은 변정일이 챔피언에 등극한 지 4개월 만에 미국에 원정,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마이크 카바할의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7회 KO패로 침몰하면서 은퇴를 했습니다. 변정일이 '김광선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며 진정한 챔피언으로 거듭난 순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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