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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깜빡하면 1초가 흐른다.
올림픽 금메달을 한 개도 아닌 2개를 품에 안은 이상화, 그의 첫 마디는 "무덤덤하다"였다. 거짓말이었다. 애써 복받치는 감정을 누르기 위해 무덤덤한척 했다. 경기 2시간 전부터 빙판에 올라 컨디션을 점검한 그에게 1초, 1초가 고통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긴장감을 풀면서 자기체면을 걸었다. 올림픽이 아니라고, 국제대회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두 차례의 역주, 승리의 여신은 결국 이상화의 손을 들어줬다.
"해냈구나." 안도였다. 지난해 4차례나 세계신기록(36초36)을 작성하며 그의 대명사는 '금메달 0순위'였다. 덫과도 같았다. 주위의 평가와 의식을 털어버리려고 무지 노력했다. 다행히 결말은 해피엔딩이었다. 그 순간 떠오른 인물은 부모님이었다. "아빠, 엄마 부모님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며 수줍게 웃었다. 이상화의 부모님은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자택에서 TV를 보면서 응원했다. 가족의 끈끈한 전류는 소치와 대한민국에서 동시에 흐르고 있었다.
눈물의 의미는?
이상화는 꾸밈이 없는 성격이다. ?털하고 시원스럽다. 웬만한 외부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환희의 눈물은 어쩔 수 없었다. "1차 레이스를 끝난 뒤에도 눈물이 났다"는 이상화는 금메달이 확정된 후에는 더 이상 눈물을 숨기지 않았다. "올림픽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월드컵처럼 치르려 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되뇌였는데 경기장에 나오니 긴장이 되더라. 4년을 기다린 올림픽이다. 끝나면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감동이 있다. 그동안 훈련해온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찡해서 그랬다." 그 말을 하면서도 이상화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였다.
금메달 딸줄 몰랐다?
"금메달을 딸 줄 몰랐다", "2연패를 이룰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굉장히 많이 들었다"…. 레이스 도중 머릿속은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1차 레이스 후 금메달 고지의 9부 능선을 넘었다고 예상했다. 독보적인 존재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컨디션도 별로 좋지 않았단다. "1차 레이스에 조 편성이 좋지 않아 상대 선수가 첫 100m에서 나와 발을 맞춰 주지 못했다, 1차 레이스는 혼자 탄다는 생각으로 탔다. 하지만 1차 레이스 후 다른 선수들의 기록도 좋았다." 사실 두려웠다. 선택의 카드는 없었다. "내 레이스에 집중하자." 이겨냈다. 금메달이었다.
무릎의 고통 그리고 신기록?
세계 최고의 스프린터, 하지만 아픔은 달고 살았다. 왼무릎 부상은 고질이다. 버티고 또 버텼다. "왼쪽 무릎은 안 좋은 지 오래됐다. 작년에 무리하면 물이 차고 아파서 재활을 병행하며 주사 맞고 했다. 지금도 안 좋다. 여름에 주사 맞고 계속 버텼다." 부상을 극복한 그의 무릎도 훈장이었다.
올림픽신기록 이야기에 '빵' 터졌다. '예상했느냐'는 질문에 "너무 과한 욕심 아니냐"며 반문했다. "올림픽 신기록이 몇 초인지도 잊고 살았다. 생각조차 안 했다. 기록보다는 메달 순위를 더 생각했다." 그는 세계기록과 올림픽 기록을 모두 보유한 '철의 여인'이 됐다. "세계 신기록과 올림픽 우승 모두 기분이 다르다." 행복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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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가 꼽은 올림픽 2연패 원동력은 체중 감량이었다. 그는 단점인 스타트를 극복하기 위해 약 4㎏을 뺐다. "스타트 훈련도 그렇지만 체중이 빠지면서 가속이 붙은 것이 비결이다." 동시에 자신에 대한 믿음을 철저하게 키웠다. "제가 열심히 한 덕을, 그리고 제 자신을 믿었다. 스스로에 주문을 외웠다. 강하고 진지하게 임하자라고."
함께 레이스를 펼친 동료들은 존경의 눈빛이었다. 그는 "네덜란드 선수들을 포함해 모든 선수들이 축하한다고 하더라. 경기 자체가 환상적이었다고 해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며 웃었다. 75초06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딴 올가 팟쿨리나(러시아)는 "마치 우사인 볼트 같았다"며 이상화를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에 빗댔다.
남은 1000m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아직 경기는 남았다. 이상화는 13일(한국시각) 1000m에 출전한다. 주력종목이 아니다. 마음을 비웠다. 그는 "1000m는 메달 도전이라기 보다는 즐기면서 타고 싶다. 1000m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타고 싶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뭘까. 흑해 구경이다. "선수촌 숙소 앞에 바다가 있다. 철통방어를 해놨더라. 가고 싶기는 한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다."
'빙속 삼남매'의 아름다운 동행, 평창은 뛸까?
이상화는 이승훈(26) 모태범(25·이상 대한항공)과 함께 '빙속 삼남매'로 통한다. 4년 전 밴쿠버 대회에서 모두 금메달을 수확했다. 이승훈이 한 살 많지만 학번은 똑같다. 모태범과 이상화는 빠른 89년생이다. 소치에선 이승훈과 모태범이 룸메이트로 동고동락하고 있다. 셋은 절친이다. 하지만 출발은 아픔이 있었다. 이승훈이 5000m에서 12위, 모태범은 500m에서 안타깝게 4위에 머물렀다.
"제 친구들이 앞에서 메달을 따줄 것으로 알았는데 굉장히 속상했다. 그래도 그 선수들에게 남은 종목이 있다. 거기서 만회할 것이다. 제 기운을 받아서 열심히 잘 해줬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끝으로 차기 대회인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이야기를 꺼냈다. 4년 후면 그는 29세다. 과연 '쾌속 질주'를 볼 수 있을까. 말을 아꼈다. "밴쿠버 올림픽이 끝났을 땐 소치에 대해 물어보셨는데 4년은 저에게 아직 먼 시간이다. 생각이 필요할 것 같다."
소치(러시아)=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