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기적 달성한 여자컬링, 그녀들의 영화같은 이야기

박찬준 기자

기사입력 2012-04-08 13:49


2012년 캐나다 세계여자컬링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첫 '4강 신화'를 일군 경기도체육회 소속 선수들로 구성된 컬링 여자대표팀 선수들인 김은지 신미성 김지선 이슬비 이현정(왼쪽부터)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태릉 =정재근 기자 cjg@sportschosun.com/2012.04.07/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 털고 빨리 연습에 매진하자."

정영섭 감독(55)의 목소리가 매서웠다. 꿈같은 일주일을 보낸 여자컬링대표팀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현실은 척박하지만, 기적의 순간은 너무나 강렬했다. 3월 캐나다에서 열린 2012년 세계여자컬링선수권대회에서 4강의 신화를 달성한 여자컬링대표팀을 6일 태릉빙상장에서 만났다. 믿기지 않는 성과까지 그녀들이 보낸 이야기는 영화같았다.

제1화, 공포의 외인구단

경기도 체육회팀에 선수들이 일신상의 이유로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팀의 버팀목 신미성(34)과 이현정(34)만이 남았다. 우승은 커녕 대회 참가도 불투명해졌다. 정 감독은 예전에 봤던 재능있는 선수들이 생각났다. 이들을 데려오려고 전국 각지를 돌았다. 이슬비(24)는 전 소속팀과의 불화로 브러시를 놓고 유치원 보조교사를 하고 있었다. 김지선(25)은 어학연수를 위해 간 중국에서도 눈칫밥 먹어가며 컬링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기대를 안고 돌아왔지만 반겨주는 이는 없었다. 김은지(22)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특기자로 인정받지 못해 학비를 대지 못하고 휴학 중이었다. 모두 손에서 컬링을 뗀 상태였다. 정 감독은 이들을 설득했다. 복귀하겠다는 답을 들을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두 다시 컬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 감독은 이들의 눈빛을 보며 '얘들의 아픔을 잘 이용하면 경기력까지 이어질 수 있겠구나'하는 확신을 얻었다. 2009년, 마침내 3년 뒤 기적을 달성할 '공포의 외인구단'이 한자리에 모였다.

제2화, 거북이 달린다

서로를 잘 알고 있던 이들은 처음부터 마음이 잘 맞았다. 컬링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만큼 연습에만 전념했다. 그 흔한 숙소이탈이나 훈련불참도 한번 없었다. 한명이 부진하면 함께 힘을 모아 극복해나갔다. 맏언니가 이끌고, 동생들이 받춰주는 팀워크는 최고였다. 문제는 여건이었다. 전용 연습장이 없어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 훈련하는 곳에서 컬링 연습을 하니 주변의 눈길이 따가웠다. 스케이트화가 아니다보니 모래나 먼지를 달고 링크 안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장비도 문제였다. 외국 선수들은 한경기 끝나면 브러시 헤드를 바꾸는데, 빨아서 써야했다. 때때로 외국 선수들이 버린 헤드를 주워와서 쓴 경우도 있다. 여름이 되면 컬링연습장 얼음을 녹여서 갈데가 없다. 중국 하얼빈에서 전지 훈련하는데 텃세 때문에 새벽 아니면 한밤중에 훈련을 해야했다. 캐나다 훈련 때는 훈련비가 부족해 민박집에서 직접 장보고 밥해먹으면서 운동했다. 그나마도 주부 선수들이 사정해가며 돈을 깎아낸 결과다. 그래도 견뎠다.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3화, 지상 최고의 게임

캐나다에서 3주간 훈련을 한 뒤, 2012년 3월 세계여자컬링선수권대회가 열렸다. 2009년 3승8패(10위), 2011년 2승9패(11위)를 기록하는데 그친 이들에 기대를 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첫 경기였던 17일 체코전에서 3대6으로 졌을 때만 해도 '역시나'였다. 자비로 현지에 날아간 정 감독은 선수들을 다그쳤다. "그동안 고생을 생각해보자. 잃을 것이 없다. 우리 실력이라도 보여줘야 하지 않겠냐." 거짓말처럼 달라지기 시작했다. 세계 최강 스웨덴을 상대로 9대8 승리를 거두며 자신감을 얻었다. 얼음 적응에도 성공하며 준비한 플레이를 마음껏 구사했다. 연승가도를 달린 대표팀은 사상 첫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전세계 컬링이 놀랐다. 캐나다 현지 팬들이 밥먹는 대표팀에게 케이크 선물을 주기도 했다. 첫 메달의 꿈이 가시권에 온 순간,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너무나 지쳤다. 마지막 순간 홈팀 캐나다에 패하며 4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기적을 달성한 여자컬링대표팀을 향해 찬사가 쏟아졌다. 쓸쓸히 떠났던 이들은 환대 속에 고국의 땅을 밟았다.


제4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직 않았다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갑작스런 관심 뒤에 불안함이 밀려왔다. 2주 앞으로 다가온 대표선발전 때문이다. 국가대표는 이들에게 훈장이 아닌 생존의 이유다. 세계선수권 4강 위업을 달성했지만, 그 뿐이다. 대표가 되지 못하면 훈련할 장소도, 지원비도 얻지 못한다. 전용경기장에 없어 상시 훈련은 불가능하다. 이들이 속한 경기도 체육회는 실업팀이 아니라 지원이 부족하다. 놀라운 성과로 라이벌 팀들이 이를 갈고 있다. 한국 경기장은 국제수준의 얼음과 차이가 있어서 팀간 차이를 내기 어렵다. 잘하는 팀 못하는 팀 모두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데다가, 특별한 작전을 구사하기 어렵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메달 획득의 꿈은 아직 꾸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도 이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한수, 두수 앞을 내다봐야 하는 두뇌플레이, 짜릿한 역전의 묘미가 있는 컬링을 누구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힘든 시련속에서도 컬링에 청춘을 바친, 바치고 있는 정영섭 감독, 최민석 코치, 신미성 이현정 김지선 이슬비 김은지는 오늘도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기적을 달성한 여자컬링대표팀은 스포츠조선이 제정하고 코카콜라가 후원하는 코카콜라 체육대상 3월 MVP로 선정됐다. MVP 트로피와 상금 100만원을 받는다.


태릉=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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