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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보다 빠른 사나이.'
두번에 걸친 약물 파동 때문이다. 약물의 덫이 잘 나가던 그의 발목을 두번이나 잡았다.
뉴욕에서 태어난 게이틀린은 고등학교 시절 허들로 육상에 입문했다. 1m85, 79kg의 이상적인 체격과 타고난 순발력, 폭발적인 스피드로 단번에 유망주로 떠올랐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코치였던 빈스 앤더슨이 그의 탁월한 스피드를 눈여겨 보고 100m, 200m 등 단거리 스프린터로의 전향을 권유했다. 앤더슨 코치의 눈은 정확했다. 2000년 테네시 대학에 입학한 뒤 스프린터로 전향한 게이틀린은 대학무대에서 6개 대회 우승하는 등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첫 시련이 그를 찾아왔다. 2001년 게이틀린은 국제무대에서 도핑에 적발됐다. 금지약물 암페타민에 양성 반응이 나타나 1년 간 대회 출전 금지 징계를 받았다. 게이틀린은 어릴적부터 겪은 '주의력 결핍 장애(Attention deficit disorder)'를 치료하기 위해 복용한 약 때문이라고 항변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없었다.
2006년 게이틀린은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2006년 5월 카타르 도하 수퍼그랑프리대회에 참가한 게이틀린은 남자 100m 결승에서 9초77을 뛰어 당시 세계기록(아사파 파월·2005년)과 타이를 이뤘다. 그런데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 2개월 뒤 도핑검사결과가 나왔는데 또 금지약물 양성 반응이 나왔다. '바람보다 빠른 사나이'가 약물의 유혹에 무릎 꿇은 패배자로 전락한 것이다. 세계 타이기록도 육상 역사에서 지워졌다.
또 두 번째 약물 사건의 휘말린 게이틀린은 영구 자격 정지를 당할 위기였다. 이대로라면 선수 생활은 끝. 하지만 게이틀린은 도핑당국의 조사에 협조하는 대신 자신이 인정하지 않던 대학시절 금지약물 복용 사건을 단순 실수로 처리하는 조건을 받아들여 간신히 '제명' 위기를 면했다. 8년 출전 정지 징계가 떨어졌다.
20대 중반에 찾아온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잠시 모교에서 육상부 후배들을 지도하며 육상과의 인연을 이어갔지만 이마저 쉽지 않았다. 결국 게이틀린은 프로 미식축구(NFL) 무대 진출을 선언했다. 세계에서 최고로 빨랐던 그는 와이드 리시버로 제2인생을 설계했다. 하지만 스피드만 가지고 프로선수들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2008년 NFL에서의 실패를 인정하고 육상계로 돌아왔다. 그가 설 곳은 트랙뿐이었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도 게이틀린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징계를 4년 자격 정지로 줄여줬다.
2010년 트랙으로 복귀한 그는 3개 대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지난달 미국대표 선발전에서는 9초95를 기록하며 다시 대표팀에 선발됐고 8월 9일 마침내 2005년 세계선수권 이후 6년 만에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출전을 확정지었다.
그에게 대구는 속죄와 명예회복의 무대다. 세계 육상팬들에게 다시 '바람보다 빠른 사나이'를 각인시킬 차례다. 고관절 수술로 세계선수권에 출전하지 못하는 타이슨 게이(29·미국)를 대신해 볼트, 파월과 명승부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
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