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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항쟁의 상징 ‘천안문 탱크맨’의 생사는?

박아람 기자

기사입력 2024-06-04 09:47


민주화항쟁의 상징 ‘천안문 탱크맨’의 생사는?
AP 연합뉴스

천안문(톈안먼 天安門) 사태 다음날인 1989년 6월 5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탱크를 끌고 천안문 광장에 들어설 때 한 남성이 맨몸으로 탱크를 막아섰다. 이 남성은 훗날 '탱크맨'이라고 불리우며, 천안문 사태의 아이콘이자, 중국 현대사 속 자유와 저항의 상징이 된 사람이다. 1998년 타임지는 '탱크맨'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했다.

'탱크맨'을 카메라에 담은 건 베이징 한 호텔 발코니에서 광장을 촬영하던 외신 기자들이었다. 당시 중국 정부는 천안문 사태가 국제사회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했고, 외신 기자들이 머무는 호텔에도 언제 공안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다.

AP 사진기자 제프 와이드너는 한 교환학생의 도움을 받아 사진을 찍었고, 이 교환학생에게 필름을 속옷에 넣어 호텔 밖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다. 또 다른 사진기자 찰리 콜도 사진을 찍은 필름 롤은 빼내고 비닐봉지에 싸서 화장실 변기 물탱크 속에 숨겼다. 카메라엔 빈 필름을 꽂아두었다. 이후 공안이 그의 카메라 속 필름을 빼앗았지만, 원본은 AP통신 도쿄 지국으로 전송될 수 있었다.

'탱크맨'의 이름은 19살의 왕웨이린(王維林)으로 알려졌다. 그는 탱크 4대를 막아선 사진으로 항쟁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으나 이후 종적을 감춰 신원과 생사 여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1994년 4월 홍콩 월간지 전초는 "왕웨이린은 곧바로 끌려가 인민무장경찰관들에 의해 죽을 정도로 구타당한 뒤 목뼈가 부러져 사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천안문사태 이후 권력을 물려받은 장쩌민(江澤民)이 밀령을 내려 왕웨이린을 찾게 하고 비밀리에 그를 처형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2006년 홍콩 명보(明報)는 왕웨이린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당시 중국 당국의 체포망을 피해 대만으로 피신, 현재 대만 남부에서 타이베이 고궁(故宮) 박물관의 고문으로 일하며 살고 있다는 것.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사실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tokkig@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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