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할 게 없다. 무엇인가 해야 할 필요도 없다. 살면서 이렇게 무료하게 있어 본 적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곳, 남원이다. 그런데 눈 딱 감고 하루만 버텨보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뭐든 할 수 있는 게 또 남원이다. 그래서 늘 남원을 방문할 때면 새롭고 설렌다. 남원을 대표하는 '춘향'과 '지리산'은 잠시 잊어도 좋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곳, 남원은 단순해서 매력적인 곳이다. 발길 닿는 곳 마다 사람의 눈과 마음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넘친다. 우아함과 여유로움마저 갖췄다. 남원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아갔다.
◇ 지리산허브밸리 전경.사진제공=한관광공사
'거점' 운봉 지리산허브밸리
지리산허브밸리는 해발 600m의 남원시 운봉읍 용산리 일대에 위치한 허브관광농원이다. 1300여 종의 허브가 자생하는 곳으로 꽃과 향기가 가득하다. 관람시설로는 사계절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과 허브의 향을 즐길 수 있는 오감 만족 허브식물원, 지리산 자연 속에 꽃과 연못이 어우러진 오헤브 정원, 허브 원재료를 이용하여 건강과 미용을 추구하는 공간으로 허브토피아관, 지리산 자생식물 400여 종의 식물 압화가 전시 되어 있는 자생식물 수목원 등이 있다. 곳곳에 마련된 휴식 공간이 많아 쉬고 싶으면 언제든 쉬면 된다.
단점은 교통 접근성이다. 남원 시내(시청 기준)에서 20㎞가량 떨어져 있어 자동차 기준 30분가량 소요된다.
◇지리산허브밸리 초입에 활짝 핀 꽃.
그러나 근처 숙박시설을 여행 거점으로 활용하면 단점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다. 지리산허브밸리 인근에는 오헤브데이호텔이 있다. 3성급 호텔로 분류되지만 만들어진 지 오래되지 않아 내부 시설 등이 깔끔하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혹자는 산속에 있어 한 번 들어가면 이후 특별히 할 게 없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그런데 이건 남원 시내도 마찬가지다. 평일 기준으로 상가와 음식점이 문을 닫는 시간은 10시 내외다. 저녁을 먹고 광한루를 걷는 게 전부다. 너무 뻔한 코스다.
지리산허브밸리의 경우 지리적 장점을 활용하면 나만의 여행 코스를 만들 수 있다. 지리산허브밸리가 위치한 운봉은 지리산 흑돼지로 유명한 동네다. 시내에 숙소를 마련했다면 흑돼지를 맛보기 위해 이동하는 시간만 왕복 1시간이 걸린다. 1시간은 남원에서 길고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운봉은 고산지대로 사과, 포도의 맛도 뛰어난 곳이다. 지역 곳곳에 있는 과수원이나 재래시장에 들러 현지인의 삶과 여유를 느끼고, 간식거리를 구입할 수 있다. 무엇보다 늦은 밤 수 많은 별을 볼 수 있는 경험은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한다. 연인, 가족과 함께라면 서로 간에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시작' 서어나무 숲, 아담원
서어나무 숲은 지리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부터 마을의 허한 기운을 막기 200여 년 전 조성된 인공 숲이다. 운봉읍 행정리에 있다. 100여 그루의 서어나무가 옹기종기 모여 만든 공간은 흡사 스위스 등 유명 관광지의 한적한 공원을 연상케 한다. 그 아름다움을 인정 받아 2000년 산림청 주최 '제1회 아름다운 숲 대회'에서 대상도 받았다.
◇ 서어나무 숲에서는 11월 말까지 오전과 오후 '숲, 그리고 나'라는 주제로 피크닉 등 체험행사가 진행된다.
올해는 생태녹색관광 육성사업지로 선정, '숲, 그리고 나'라는 주제로 오전과 오후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서어나무 숲은 오전과 오후 진행되며 11월까지 무료다. 돗자리와 피크닉 세트를 제공, 아무 곳에서 눕거나 앉아 휴식을 즐기면 된다. TV에서나 보던 음향 장비를 이용할 수 있어 바람소리부터 자연의 모든 소리를 오롯이 느끼는 것도 가능하다.
여행과 휴식, 이색 경험을 아무런 준비 없이 할 수 있다.
◇ 아담원원 정원을 따라 산책로가 마련돼 있고, 중간 중간 쉬는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아담원은 남원 시내와 운봉 사이에 있는 수목원이다. 음료와 차를 즐길 수 있어 현지인이 즐겨 찾았지만, 최근 외지인의 방문이 부쩍 늘었다. 잘 꾸며진 정원을 따라 산책로가 마련돼 있고, 건축물과 자연의 조화가 만들어 낸 공간마다 여유로움을 품고 있다.
지리산허브밸리에서 서어나무 숲은 자동차로 5분 정도, 아담원은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남원 여행의 거점으로 지리산밸리를 추천한 이유다.
'중간' 뱀사골 계곡, 와운마을 천년송
뱀사골 계곡은 지리산 반야봉에서 반선까지 산의 북사면을 흘러내리는 길이 14㎞의 계곡이다. 물소리와 새소리가 가득하고, 사계절 내내 저마다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 봄철에는 철쭉꽃이 계곡을 메우고 여름철에는 푸른 녹음이 시원함을 선사한다. 가을에는 단풍, 겨울은 설경이 아름답다. 가을 단풍의 절정은 10월 말부터 11월 초 사이다.
◇ 가을 단풍이 물든 뱀사골 계곡은 한 폭의 산수화 같은 풍경을 자랑한다. 사진제공=남원시
뱀사골 입구부터 시작되는 풍경과 계곡 사이를 흐르는 물만 보고 있어도 서너 시간은 금방 훌쩍 지나간다. 쉬는 게 무료해졌다면 와운마을로 발길을 옮겨보자. 뱀사골탐방안내소에서 와운마을까지 거리는 5.6㎞ 정도다. 호기롭게 출발했지만, 힘이 들면 완만한 경사의 데크길 1㎞가량만 산책하듯 둘러봐도 좋다. 나머지 거리는 차량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차량을 이용해 와운마을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마을 식당이나 숙박시설, 남원 관광택시 등을 이용해야 한다.
◇ 와운마을의 천년송.
각자 방법을 통해 산속 작고 평화로운 와운마을에 도착하면 천년송을 마주할 수 있다. 천연기념물 424호인 천년송은 수령이 500여 년으로 추정되는 높이 20m의 소나무다. 할매(할머니)송과 한아시(할아버지)송이 함께 있다. 크고 오래된 할매송을 '천년송'이라고 부르며 당산제를 지낸다.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로 알려져 천년송을 보러 남원에 방문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할머니송은 막걸리를 좋아한다고 하니, 와운마을로 출발 전 막걸리 한 통을 들고 올라가는 게 좋다.
'마무리' 정령치, 남원시립 김병종 미술관
차로 방문할 수 있는 남원의 지리산 최고 명소는 정령치다. 흔히 지리산 노고단 입구인 성삼재휴게소를 떠올리지만, 성삼재휴게소는 행정구역상 구례에 속한다.
◇남원 정령치 전경.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정령치에는 지리산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동쪽으로 바래봉과 뱀사골 계곡이, 서쪽으로 천왕봉과 세석평전 반야봉 등과 남원 시가지가 한 눈에 펼쳐진다. 눈 앞에 펼쳐지는 산 병풍 사이에서 작고 하얀 동그라미처럼 와운마을도 찾을 수 있다. 정령치는 1시간 남짓이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어 여행의 마무리를 위한 곳으로 안성맞춤이다.
◇남원시립 김병종 미술관은 힐링과 동시에 예술 작품을 관람 할 수 있어 매력적인 곳이다.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정령치를 넘으면 남원 시내다. 남원시립 김병종 미술관은 남원 시내에 있다. 남원 출신 김병종 작가가 무상으로 남원에 기증한 400여 점의 작품과 5000여 권의 서적, 화첩기행 친필 원고 등을 토대로 2018년 설립됐다. 월요일 휴관을 제외한 나머지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되며, 관람료는 무료다. 전시는 김병종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기획전시회도 열린다. 전시 작품은 수시로 교체, 매번 방문해도 새로운 느낌이 든다. 카페를 비롯해 곳곳에 휴식 공간이 마련, 힐링 공간 및 인생샷 명소로 떠오르며 방문객의 발길이 꾸준히 늘고 있다.
올해는 개관 5주년을 맞아 지난 2일부터 11월 13일까지 김병종 작가를 대표하는 '화홍산수', '송화분분', '풍죽' 세 가지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특별전이 진행된다. 유치석 김병종 미술관 관장은 "특별전을 통해 김병종 화백이 보여주고자 했던 '생명의 순환'에 대해 사색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고 말했다. 김세형 기자 fax123@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