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직권으로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을 동일인(총수)으로 지정한 가운데 조 회장에게 '회장' 직함으로 호칭하는 것을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 회장 측이 지주회사인 한진칼 지분을 14% 넘게 보유한 행동주의펀드인 KCGI(강성부펀드)와 접촉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양측의 협력가능성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 회장이 KCGI를 우호세력으로 끌어들인다면 정통성을 갖춰 명실상부한 회장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회장을 회장이라 부르지 못하는 까닭은
그런데 2주 후 예상치 못한 곳에서 '회장'이 아닌 정황이 발견됐다. 공정위는 매년 5월초 공정자산 5조원을 넘긴 기업집단을 공시대상으로 지정한다. 이 때 공정위는 기업집단(재벌그룹)에 주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일인(총수)도 지정한다. 기업집단 및 동일인 지정 기한은 매년 5월1일이고, 사정에 따라 15일까지 미룰 수 있다.
공정위는 지난 4월8일 갑작스런 조양호 회장의 별세로 공시대상 기업집단 발표 날짜를 애초부터 5월1일이 아닌 5월8일로 늦춰 잡았다. 한진그룹의 후계구도가 정리될 때까지 시간을 준 것이다. 그런데 공정위는 전날 일정을 긴급히 취소했다. 한진그룹이 공정위에 "차기 동일인을 누구로 할지에 대한 내부적인 의사 합치가 이뤄지지 않아 동일인 변경 신청을 못하고 있다"고 소명했기 때문이다. 한진그룹이 조원태 회장이 '총수'(동일인)가 아니란 것을 시인한 셈이다.
그러자 공정위는 직권으로 조원태 회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기로 하고 발표일인 5월15일까지 서류를 내라고 요구했다. 공정위는 동일인을 지정할 때 지분율과 경영활동에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여부 등을 토대로 판단한다. 한진그룹의 경우 조 회장이 지분 자체는 많지 않지만 임원 선임이나 신규 투자 결정 등 주요 경영활동에 가장 영향력이 크다고 판단해 직권으로 지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진그룹은 공정위에 '동일인 변경 신청서' 대신 조 회장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형성될 지배구조 관련 자료를 냈다. 동일인으로 지정되면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그룹 총수가 된다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한진그룹은 지난 4월24일 조 회장이 한진칼 회장으로 '선임'된 것이 맞는다면 동일인은 당연히 조 회장으로 했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국 한진그룹은 동일인 변경 신청 서류를 내지 않아 오너 일가간 '그룹 회장'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음을 인정한 꼴이 됐다. 어쨌든 지난 15일 공정위는 조원태 회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했다.
한진그룹이 조 회장을 동일인으로 변경하는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은 또 다른 정황도 드러났다. 지난 14일 한 언론을 통해 조 사장이 한진칼 '대표이사'에 임명된 것은 맞으나 '대표이사 회장'은 아니란 것이 뒤늦게 보도됐다. 조 회장이 그룹 회장에 선임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 회장은 그룹 회장 취임식도 갖지 않았다. 조 회장의 회장 선임에 오너 일가 간 합의가 없었음이 확실해진 것. 이에 대해 한진그룹 관계자는 "한진칼 이사회에서 조원태 이사를 대표이사로 '선임'했고, 참석한 이사 전원이 회장 취임에 '동의'했다"고 해명했다. 조 회장에 그룹 회장에 오른 것이 맞는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일각에서 법적 정당성을 갖춘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한진그룹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고 '이사들의 동의'로만 선임한 것은 정관 위배라는 것. 때문에 일부 언론은 조 회장을 '한진그룹 회장'보다는 '대한항공 사장'으로 칭하고 있다.
일단 한진그룹은 조 회장을 '회장'으로 몰고 가는 분위기다. 오는 6월1∼3일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연차총회의 의장에 조 회장이 선출됐다는 보도자료를 내면서 조 회장을 '한진그룹 회장'으로 표기한 것. 이와 관련, 한진그룹 관계자는 "(조원태 회장이) 공정위에서 동일인(총수)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공정위가 지정하는 동일인은 정부가 일감몰아주기 등 규제를 위해 편의적으로 시행하는 것인데 이를 갖고 그룹 회장 호칭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좀 황당하다"며 "이는 한진그룹 내에서 리더십과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한국 재벌사에서 벌어지기 힘든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강성부펀드, 조원태 회장의 백기사 될까
이처럼 오너 일가 간 그룹 경영에 의견일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한진그룹 경영권은 안갯속이다.
일단 고(故) 조양호 회장의 유언장이 없다면 상속비율대로 한진칼 지분이 상속될 가능성이 높다. 한진칼은 조양호 회장이 17.84%, 장남 조원태 사장이 2.34%,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2.31%, 차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2.30%의 지분을 각각 보유하고 있다.
민법상 법정상속이 이뤄질 경우 조양호 회장의 배우자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과 세 자녀는 1.5:1:1:1로 배분하게 돼 이 전 이사장은 약 5.95%, 삼남매는 각각 약 3.96%의 지분을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한진칼 지분은 기존 보유지분까지 합해 조원태 사장이 6,30%, 조현아 전 부사장이 6.27%. 조현민 전 전무가 6.26%를 각각 갖게 된다. 한진칼 지분이 1주도 없던 이명희 전 이사장의 지분율이 5.95%에 이르게 된다. 조 회장이 모친이나 두 누이와의 지분율 차이가 거의 없어 절대적인 지배력을 갖기는 어려운 상황이 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남매의 난'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대기업의 한 임원은 "조양호 회장이 와병중인 상태에서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은 것이 재벌그룹 정서상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다"면서 "한진그룹 2세들은 유언장이 있었음에도 재산 싸움이 있었는데다 한진 3세들의 그동안의 행보로 미루어볼 때 재산(경영권)을 갖고 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한진그룹은 조중훈 창업주 타계 이후 재산 문제로 2세 형제들이 '형제의 난'을 벌인 바 있다. 지난 2002년 선친이 작고하면서 장남인 조양호 회장이 대한항공과 ㈜한진을, 차남 조남호 한진중공업홀딩스 회장은 한진중공업을, 3남 고 조수호 회장은 한진해운을, 4남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은 한진투자증권(현 메리츠금융)을 물려받았으나 유산분배 등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당시 조남호 회장과 조정호 회장은 선친의 유언장이 조작됐다며 조양호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또 조남호 회장은 기내 면세사업권을 갖고 조양호 회장과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땅콩 회항'과 '물컵 갑질'로 각각 경영에서 손을 뗀 조현아 전 부사장과 조현민 전 전무가 당장 경영 전면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보다는 물밑에서 자신들이 가져갈 계열사를 놓고 조 회장과 협상을 벌일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가령 칼호텔네트워크 등은 조현아 전 부사장이, 진에어는 조현민 전 전무가 각각 맡는 것으로 조원태 회장과 타협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대기업의 한 임원은 "공정위에서 조원태 회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한데다, 우리나라 재벌 정서상 장자가 그룹 경영권을 가져가기에 조 회장을 중심으로 (그룹 경영권이) 정리될 것으로 본다"며 결국 한진그룹이 조 회장 체제로 가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한진그룹 내부 사정에 밝은 항공업계의 한 관계자도 "조현아 전 부사장이나 조현민 전 전무는 갑질 논란 때문에 경영에서 손을 뗀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라 다시 복귀하는 것은 힘들 것으로 본다"며 "한진그룹 내부에서도 조원태 회장으로 경영권이 빨리 정리돼 그룹이 안정을 찾았으면 하는 의견들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조원태 회장이 한진칼 2대주주 KCGI와 접촉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양측의 협상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해 경영 참여를 선언한 뒤 한진칼 지분을 적극적으로 매입하던 KCGI는 조양호 회장 별세 이후에도 지분을 추가 매입해 지분율을 14.98%까지 끌어올렸다. 다만, KCGI는 경영권을 갖기 위한 목적은 없다고 밝히면서 적대적인 M&A(기업인수·합병)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 KCGI가 조원태 회장과 손을 잡고 '백기사'(현 경영진의 경영권 방어에 우호적인 주주) 노릇을 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 댓가로 적절한 보상책을 조 회장에 요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조원태 회장이 정통성을 갖추고 진정한 한진그룹 총수로 우뚝 서려면, 한진칼 우호지분을 많이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며 "KCGI를 백기사로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유인책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앞서의 재계 관계자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회장 직함에 너무 연연해하는 모습은 오히려 최고경영자(CEO)로서 이미지를 나쁘게 할 수 있다"며 "조원태 회장은 KCGI를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등 그룹내 임직원에게 CEO로서의 자질이나 리더십을 보여주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조완제 기자 jwj@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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