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계 화장품 회사인 시세이도의 한국 법인인 한국시세이도(이하 시세이도)가 하청업체에 대한 '갑(甲)질' 논란에 휘말렸다.
이로 인해 시세이도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아니냐는 예측을 낳고 있다. 특히 이번 논란과 관련해 전략적 요충지인 한국에서 시세이도의 제2의 전성기를 열어줄 것으로 기대하며 임명된 황학상 사장의 이름까지 거론되고 있어 향후 파장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하청업체 튜브 '을(乙)'의 눈물… "시설투자 요구하더니 불과 3개월 뒤 계약 만료 통보"
문제는 지난해 8월 시세이도가 튜브에 물류 관리 기계 설비에 추가 투자를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튜브의 한 관계자는 "시세이도 담당자가 '앞으로 작업이 늘어날 것 같으니까 준비를 했으면 좋겠다'며 구두로 요청했다"고 전했다. 당시 금전적 부담이 컸던 튜브지만 주 고객사인 시세이도의 요청인 만큼 더 많은 업무를 대행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속에 무리를 해가며 물류 설비를 늘렸다.
그런데 튜브에 따르면, 시세이도는 튜브에게 추가 시설 투자를 요청한 뒤 불과 3개월이 지난해 11월 갑작스럽게 거래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시세이도와 튜브는 2015년 3월 1일부터 2017년 2월 28일까지 업무 대행 계약을 맺었다. 계약만료 3개월 전에 서면에 의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1년 단위로 자동 연장된다는 계약서 조항(제 9조)에 따라 거래 기간은 2018년 2월 말까지 1년 자동 연장돼 있던 상황이었다.
튜브 입장에서는 추가적으로 설비 투자도 한 만큼 당연히 계약 기간이 연장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시세이도 측으로부터 계약 종료 3개월 전인 지난해 11월 30일, 계약기간 만료를 일방적으로 통보받았다. 아무런 사전예고가 없었던 시세이도의 행동은 힘없는 하청업체 입장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다.
지난 4년간 시세이도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일해 온 튜브를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시세이도가 밝힌 계약 만료 사유였다. 시세이도는 공문을 통해 "추후 유통가공 전반에 대한 효율적인 증대와 원활한 물류 운영 환경을 조성하고자 상기 계약 기간의 만료를 통보한다"고 밝혔다. 이는 불과 3개월 전에 하청업체에 추가적인 설비 투자를 요구한 행동과는 상반된다.
이와 관련 시세이도는 튜브에 설비투자 요청 자체를 한 적이 없다고 강력 부인하고 있다. 시세이도 측은 "(튜브가) 시설을 더 갖춘다고 해서 시세이도 입장에서는 어떠한 득이 생길 것이 없어 시설 확충을 요청할 이유가 없다"며 "튜브에서 구축한 시설은 포장 자동화 설비로 시세이도만을 위한 전속설비가 아니고 업무효율성을 높이고자 한 튜브 측에서 판단해 투자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이번 사안은 시세이도의 도덕성이 걸린 진실공방으로까지 번져갈 태세다.
'갑(甲)' 시세이도, "적법한 절차"…그런데 신규 하청업체는 황학상 사장 지인?
튜브는 이번 계약 만료 갑질을 주장하면서, 시세이도 황학상 사장의 연관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로레알코리아 창립 멤버인 황학상 사장은 한국 시장 내 랑콤, 비오템, 슈에무라, 키엘, 입생로랑 등 글로벌 브랜드들의 성공적인 초기 성장을 이끌었던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지난 2015년 시세이도의 수장이 됐다.
튜브가 황 사장을 의심하는 대목은 튜브를 대신해 새로운 유통가공 대행사로 선정된 A기업 대표가 공교롭게 황학상 사장과 같은 로레알 출신이기 때문이다. 튜브의 한 관계자는 "처음에는 A기업 대표와 황학상 사장의 관계를 몰랐다"며 "나중에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됐을 때 시세이도가 A기업에 일감을 주기 위해 계약을 연장하지 않은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시세이도는 황학성 사장의 배후설에 대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시세이도 측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튜브와의 계약만료 이후 사내 계약부서에서 내부 규정과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새로운 하도급업체를 선정해 튜브보다 나은 조건에 따라 새로운 계약을 체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문제는 시세이도의 갑질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튜브 측의 주장이다. 튜브에 따르면 지난해 9월, 시세이도는 양사 간 계약서에 따라 모든 상품에 대한 업무를 튜브 측에 맡겨야 하지만 크렘쉘 작업 등 일부 작업은 다른 회사에 일방적으로 이전시키기도 했다는 것. 이 같은 행위는 명백히 계약위반이자 불공정 행태지만 '을'인 튜브는 '갑'인 시세이도와의 계약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제대로 된 항변조차 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해 시세이도 측은 "해당 업무는 튜브와 계약할 때부터 하던 업무가 아니라, 다른 업체와 진행하던 업무인데, 그 업체가 사정이 생겨 1년 정도 일시적으로 튜브와 진행했던 작업이다"는 입장을 보내왔다.
시세이도와의 계약 만료로 튜브의 매출은 반토막 났다. 동시에 기존 40명 가량 되던 회사 직원들 역시 절반으로 줄었다. 결국 튜브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시세이도의 불공정행위에 대해 제소를 했고 현재 공정거래조정원에서 조정 협의 중이다.
이번 갑질 논란과 관련해 본지는 시세이도 측에 여러 질문을 했지만 "현재 튜브의 신청으로 분쟁조정 절차가 진행 중이고 당사는 비공개 원칙을 준수하며 성실히 응하고 있다"며 "이 사건 계약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해지되었음이 명백하고 그 외에 당사로서 어떠한 계약 위반행위나 위법행위도 없었다"는 답을 반복했다. 이어 "튜브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당사가 하도급업체에 부당한 계약해지로 손해를 입힌 기업으로 보도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업계에선 이번 논란과 관련, 을과의 상생을 고민하는 시세이도의 전향적 태도에 대한 아쉬움을 지적하는 목소리 또한 높다. 설사 튜브의 주장이 100% 틀리고, 시세이도의 계약 해지 과정이 모두 적법했다 하더라도 4년을 함께 한 하청업체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비난만큼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황학상 대표는 '생각은 글로벌 하게, 행동은 현지화에 알맞게'라는 시세이도의 기업 이념에 적합한 인물로 한국시세이도의 수장이 됐다"며 "하지만 최근 국내에서 가장 핫한 이슈 중 하나인 갑질 논란에 휘말린 것은 한국시세이도의 제 2의 전성기를 만들어 갈 소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이정혁 기자 jjangg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