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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전설 이규승의 마장산책

신보순 기자

기사입력 2018-07-26 14:27


경마전설 이규승의 마장산책

1993년 8월 14일 개인마주제가 출범하면서 마주 전용실은 붐볐다. 마주들이 자신들의 말이 뛰는 모습을 보려고 가족과 함께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에 마권을 걸고 열렬히 응원했다.

소유 말이 선두에 나서면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조금이라도 뒤쳐지면 아쉬워했다. 또 아슬아슬한 승부전을 펼칠 때면 손에 땀을 쥐며 목이 터져라 응원했고, 그러다 우승하면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월드컵 응원전을 방불케 했다.

전직 장차관, 예비역 장성 등 사회지도층 인사와 부인들이 동심으로 돌아가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것이 경마의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덩치의 말들이 지축을 울리며 펼치는 레이스는 박진감이 넘치고 스릴 만점의 드라마와 다름없다. 숨막히는 승부전에서 연출되는 진한 감동은 세상사에서 쌓여진 스트레스가 말끔히 사라지고 새로운 활력을 얻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런 가운데서 재미삼아 산 마권이 적중이라도 하면 그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게 된다. 적중의 그 순간 사회적 지위와 체면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동심에 젖어들어 깡충깡충 뛰면서 손뼉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개인마주제는 그처럼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시작됐다.

그동안 한국 경마는 단일마주제로 운영돼왔었다. 마사회가 모든 경주마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모든 나라가 개인마주제를 하고 있는데 한국만 시행체가 경주마, 기수, 경주개최, 마권발매를 모두를 독점하는 체제여서 한국은 '경마 독재국가'라는 놀림을 받기까지 했다.


마사회는 개인마주제 전환을 위해 '마주제개발실'이라는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전환을 추진했으나, 단일마주제에서 개인마주제로 전환한 사례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야 전환하게 됐다.

첫 마주 모집에서 780명이 신청, 이 가운데 400명을 선정했으나 이중 30명이 포기해 370명으로 출발했다.

이들은 경마에 퍽이나 애착을 가졌다. 커다란 덩치에 힘차게 질주하는 모습이 너무도 늠름하고 대견스러웠기에 온갖 사랑을 쏟아붓다시피 했다. 수시로 각설탕이나 당근을 사들고 마방으로 찾아와 말에게 먹이고 놀아주고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행여 다치기라도 하면 눈물을 글썽이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마주들도 있을 만큼, 말사랑은 자식 사랑 못지않을 정도였다.

말이 너무 좋아 함께 지내고 싶다며 마방에 침낭을 갖고 온 마주도 있었다. 마방에서 잘 수는 없기에 마방내 숙직실에서 가끔 자곤 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한동안 지속됐고 경마계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인 마주들을 통해 경마가 사회에 좋은 이미지로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필자는 최근 과천경마장엘 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찾는 경마장이라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다.

관람대부터 분위기가 확 바뀌어있었다. 관람대는 1층부터 경마팬들로 발 디딜틈 없을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던 과거와 달리 한산했다. 탁자를 충분히 설치해 팬들이 앉아서 간식을 들며 경마를 즐기는 모습이 지난날과 딴판이었다.

초조한 눈빛에 육두문자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경마팬들은 사라지고 어린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엄마 아빠와 어울려 노는 모습이 주말 나들이장으로 변한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관람대 6층으로 올라가는데 과거 홍콩 경마장에 출장 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관람석 한켠에서 경마팬 수백명이 소리치며 응원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들은 깃발을 흔들며 응원하는데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깃발에는 '짜유(加油)'라는 두글자가 새겨있었다. '파이팅'을 뜻하는 것이다.

어느 출전마 하나를 응원하는 것 같았다. 경마선진국이라 경주마도 팬클럽이 있는가 싶었다. 경주마를 얼마나 좋아하기에 저토록 열렬히 응원하는지 궁금해 홍콩자키클럽 관계자에게 물어보았더니 기업마주의 직원들이란다. 기업이 마주로 참여하고 있고 그 회사 직원들이 단체로 응원을 나온 것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언젠가 저런 시대가 오겠지' 생각하던 그 시절이 떠올라 발걸음을 마주 전용실로 옮겼다.

변함없이 많은 마주들이 나와 있었으나 아는 얼굴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고 경마팬도 바뀌었으니 마주들도 바뀌었으리라 생각했는데 마주협회 관계자로부터 실망스런 이야기를 들었다.

마주들이 계속 떠난다는 것이다. 초창기 마주 370명 가운데 60여명만 남아있는 실정이란다. 새로 뽑으면 떠나고 또 뽑으면 또 떠나 지금은 거의 상시 모집하다시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사회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니 마주모집공고가 지속적으로 올려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은 적자 마주가 속출하기 때문이란다. 전체마주 가운데 60% 이상이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마주가 신마를 사서 본전을 건지려면 4등급까지 승급해야 하는데 그런 말이 40%를 밑돈다는 것이다.

"누가 적자를 감수하면서 마주를 하겠습니까. '외국에선 명예직인 마주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줄을 선다'고 하지만 그건 옛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주들이 '경마전도사' 역할을 해주리라던 기대감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오히려 '역전도'에 나서지나 않을지 염려되는 것이다.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인사들을 마주로 영입했으면 수지가 잘 맞도록 해줘서 경마의 좋은 이미지를 널리 전하도록 하는 게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전 스포츠조선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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