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초순, 간혹 심술을 부려대는 꽃샘추위가 있어도 이제는 코끝에 와 닿는 바람이 부드럽다. 연중 여행을 떠나기에 가장 좋은 시절, 이즈음 매화 등 남녘의 꽃소식도 간간히 들려오지만 군락을 이루는 본격 꽃 사태는 아니어서 말 그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격이다. 이럴 때 꽃구경으로는 동백꽃이 으뜸이다. 선홍빛 꽃잎이며 초록의 강건한 잎새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생기가 넘쳐난다. 동백꽃의 매력은 낙화(落花)에도 있다. 붉은 카펫을 펼쳐 놓기라도 하듯 탐스러운 꽃송이가 흩뿌려져 있는 모습이란 활짝 핀 자태 못지않다.
글·사진 =김형우 문화관광전문 기자 hwkim@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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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 자락에 파고든 신라고찰 백련사에는 300~500년 수령의 아름드리 동백 7000여 그루가 빼빽히 숲을 이루고 있다. 하늘을 뒤덮은 동백숲에 붉은 동백꽃이 활짝 피어날 즈음이면 숲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진만의 푸른 바다와 천년세월을 품은 사찰이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아낸다.
이처럼 동백나무가 유독 사찰 주변에 많은 이유가 있다. 동백의 낙화는 '제 아무리 화려했던 삶도 찰나에 지고 마는 것이 인생'이라는 불가의 가르침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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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사찰 입구에서부터 경내까지, 그리고 가람에서 다산초당에 이르는 오솔길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동백나무가 밀생해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돼 있는 아름다운 숲길이 이어진다.
특히 이 숲길은 '천주학쟁이'로 몰려 유배 중이던 다산 정약용과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가 오가며 학문을 나눴던 길로도 유명하다. 동백 숲에서 산허리를 몇 굽이돌면 정약용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초당이 나선다.
기암괴석이 명멸하는 절경은 아니지만 800m 길이의 '다산 오솔길'은 기분 좋은 느낌이 물씬 배어나는 편안한 숲길이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품은 만덕산(408m)은 예로부터 야생 차나무가 지천이었다. 강진에서만 18년 유배생활을 보낸 정약용이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이라 한 연유도 여기에 있다.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며 걷기에 적당한 흙길 양옆으로는 야트막한 키의 야생 차나무 자생지가 줄지어 이어진다.
고갯길을 넘어서자면 등이 꼽꼽해지고 이내 강진만의 부드러운 해풍이 이마의 땀방울을 시원스레 닦아준다. 남해의 풍광이 한눈에 펼쳐지는 지점에는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다산이 고향과 가족을 그리고, 특히 함께 유배돼 흑산도로 간 형 약전을 그리워했던 곳이다.
천일각 아래 솔숲에는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이 강진 유배 18년 중 10년을 머물렀던 곳으로, 후학도 양성하고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방대한 서적을 저술한 조선 실학의 산실인 셈이다.
다산은 스물 한 살의 나이에 한양에서 남쪽의 땅 끝까지 쫓겨 왔다. 서른아홉까지의 기나긴 유배세월의 고독을 야생차와 수백 권이 넘는 다작으로 달랬다.
초당 주변에는 유배생활의 단출한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다산이 바닷돌을 주워 다가 만든 연못과 약수터, 솔방울로 차를 끓여 마셨다는 둥그스름한 바위가 마당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유배생활을 청산하며 바위에 새겼다는 '정석(丁石)'이란 글씨도 남아 있다.
초당에서 마을 아래 다산유물전시관까지의 오솔길도 옛 모습 그대로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소나무와 편백나무, 동백, 대나무가 적당히 어우러진 숲길은 나무뿌리가 길을 뒤덮는가 하면 기암괴석이 바닥을 이루고도 있다. 시원하게 불어대는 댓바람 속에 울어대는 동박새의 지저귐에 한결 경쾌한 발걸음이 이어진다.
◆오동도(전남 여수)
3월 초순, 전남 여수에 위치한 동백섬, 오동도를 찾으면 동백꽃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오동도의 동백(冬柏)은 말 그대로 겨울에 꽃을 피운다. 봄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마량, 선운사의 춘백(春栢)과는 또 다르다. 12월부터 꽃망울을 맺기 시작해 겨울을 지나 이듬해 3월 절정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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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도는 면적이 12만 2100㎡의 아담한 규모이지만 그 속은 옹골차다. 아기자기한 '봄동산'이 펼쳐져 있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2㎞의 산책로에서는 숲과 바다를 교차하며 용굴 등 한려수도의 비경을 만나게 된다.
수백 년 수령의 동백 4000여 그루가 하늘을 뒤덮고, 키를 훌쩍 넘어 터널을 이루는 산죽 길도 운치 있다. 산책로 주변에는 난대 수종이 밀생하고 있다. 구실잣밤나무, 돈나무, 후박나무 등 상록활엽수와 해송,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화살을 만들어 썼다는 키 작은 대밭(신이 대)도 펼쳐져 있다. 산책로 곳곳에 흩뿌려진 동백꽃송이도 아름답다. 하지만 낙화한 꽃송이를 바라보자면 안타까운 것이 마음까지 다 애잔해진다. 동백 낙화는 3월이 가까울수록 더 화려한 자태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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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카페 '동박새 꿈정원'에서는 따끈한 동백차 한 잔을 맛볼 수 있다. 동백꽃잎을 재워 발효시킨 동백차는 새콤달콤 쌉쌀한 뒷맛이 오묘하다. 동백차는 피를 맑게 해주고 어혈을 풀어주는 데에도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동도 동백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슬픈 전설 하나가 전해진다. 옛날 한 부부가 오동도에 정착해 살았다. 마침 남편이 고기를 잡으러 나간 사이 강도가 들어 부인을 겁탈하려 하자 도망을 치던 부인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이후 부인이 묻힌 자리에서 선홍빛 꽃망울을 맺는 아름다운 동백나무가 자라기 시작해 오늘의 동백숲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오동도는 동백 일색이다. 그럼에도 오동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섬의 생김새가 오동나무 잎을 닮았기 때문이다.
한편 여수의 동백 감상지로는 거문도 수월산도 빼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