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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감독이 2014년 브라질월드컵을 이끈다.
줄다리기는 끝났다
최강희 감독이 최종예선 후 지휘봉을 놓는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축구협회는 대표팀 분위기를 고려, 차기 감독 선임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다만 수면아래에선 지난 연말부터 차기 A대표팀 사령탑 후보로 홍 감독을 올려놓고 설득작업을 벌였다. 올초 축구협회장 선거를 통해 집행부가 교체됐다. 황보관 기술위원장이 유임돼 연결고리가 됐다.
계약기간이 문제였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과 2018년 러시아월드컵, 1년과 5년의 갈림길이었다. 합의점을 찾았다. 축구협회는 큰 과오가 없는 한 2018년 러시아월드컵까지 홍 감독에게 한국 축구의 운명을 맡길 계획이다. 허 부회장이 "차기 감독이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협회 차원에서 배려할 것"이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준비된 대표팀 사령탑
"이 길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이라면 피하고 싶지는 않다. 선수 시절 쌓아놓은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겠다." 2005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홍 감독의 출사표였다. 청소년대표, 아시안게임대표, 올림픽대표 감독으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은 그는 정점인 월드컵대표팀의 지휘봉을 잡는다.
홍 감독은 현역 시절 1990년 이탈리아 대회를 필두로 4회 연속 월드컵 무대에 섰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가 피날레였다. 은퇴 후에는 차근차근 행정가 수업을 받았다. 돌발변수가 생겼다.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당시 베어벡 코치를 앞세운 아드보카트 감독이 끈질기게 구애했다. 결국 두 손을 들고 현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온갖 시샘이 가득했다. 지도자 자격증이 문제가 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는 감독 후보 1순위였지만 "초등학교 감독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대표팀을 이끄느냐"는 비아냥거림이 쏟아지면서 결국 낙마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9년 감독 홍명보 시대가 열렸다. 특별했다. 이집트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청소년월드컵에서 8강 신화를 연출했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은 두 번째 도전이었다. 희비의 쌍곡선을 그린 끝에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결승 진출 문턱인 4강전에서 아랍에미리트를 만나 연장 혈투를 치렀지만 끝내 좌초했다. 0대1로 무릎을 꿇었다.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휘감았다. 반전이 있었다. 이란과의 3~4위전은 그의 시계를 다시 돌렸다. 1-3으로 뒤진 후반 33분 갱없는 드라마가 연출됐다. 와일드카드(23세 초과 선수) 박주영(아스널)이 골문을 열었다.
지난해 런던올림픽 동메달 신화는 그를 명장 반열에 올려놓았다. 더 이상 지도자 홍 감독의 능력을 놓고 토를 달 사람은 없다.
무결점 선수 장악력
세상은 과정이 아닌 환희만을 기억한다. 실력보다는 운이 좋다는 말을 한다. 모르는 얘기다. 그는 고통, 눈물과 동거했다. 고교시절 우유에 밥을 말아 먹기 시작했다. 남들은 웃을 일이지만 우유에 밥을 마는 심정은 처절했다. 크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대표팀 승선까지 굴곡의 연속이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선수 길들이기'에 달인이다. 33세 최고참 홍명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만큼 혹독했다. 양지와 음지를 모두 경험했다.
선수들도 홍명보라는 이름 석자에 고개를 숙인다. 홍 감독에게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단다. 홍 감독도 일단 임무를 맡으면 주저하지 않는다. 늘 맨앞에 선다. 제자들의 미소와 아픔, 고민을 품는다. 때론 카리스마를 앞세운 강력한 리더십으로, 때론 눈물도 숨기지 않는 부드러운 모습으로 선수들에게 감동을 선물한다. 개인보다는 팀, 기량보다는 정신력이 우선이다.
월드컵에서 홍명보 시대가 열렸다. 결코 우연이 아닌 인선이다.
그의 발끝에서 사상 첫 월드컵 4강, 머리에서 사상 첫 올림픽 4강 신화의 역사를 썼다. 이젠 월드컵이다. 브라질을 향한 홍 감독의 새로운 진군이 시작됐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