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니까 기회도 돌아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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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 게 없었다. 1m87-80kg의 당당한 체구. 탁월한 힘에 높은 수비 지능, 빌드업 능력까지 갖춘 그는 한국 축구의 미래로 불렸다. 2012년 런던올림픽 동메달로 병역 특례까지 받으며 날개를 달았다.
김기희는 카타르 리그 알 사일리아 임대생활을 거친 뒤 2013년 '거함' 전북에 둥지를 틀었다. 입단 첫 해 리그 19경기를 뛰며 연착륙 한 뒤 2014년 28경기, 2015년엔 33경기 소화했다. '최강' 전북에서도 그의 입지는 확고했다. A대표팀의 중앙 수비 역시 그의 몫이었다. "많은 분들의 도움과 가르침이 있었다.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계속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야말로 '초고속 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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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없는 성장은 없다. 2016년 2월 중국 슈퍼리그 상하이 선화로 이적하며 상승일로였던 김기희의 축구인생에 이상징후가 발생했다. 슈틸리케호의 주축 수비수였던 그는 월드컵 최종예선 부진의 '원흉'이란 지탄을 받았다. 여기에 '중국화 논란'까지 더해지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갔다. 팬들의 사랑을 받고 무럭무럭 성장한 김기희는 그렇게 비판의 중심에 섰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살 수도 있나 싶었다."
상상 이상의 비판에 움츠러든 마음, 하지만 다른 방도는 없었다. 김기희는 "대표팀 뽑혔을 때 결과와 실력으로 보여드렸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이 있는 건 당연하다"며 "이 상황을 바꾸려면 실력과 좋은 결과로 보여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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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
벼랑 끝에 선 김기희, 더 이를 악물었다. 한데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올 시즌 개막전 중국 슈퍼리그 외국인 규정이 변경됐다. 5명 보유 4명(아시아쿼터 1명) 출전에서 5명 보유 3명 출전으로 제한됐다. 아시아쿼터도 사라졌다. 설 자리가 좁아졌다. 김기희는 "안 좋은 일이 계속 되더라. 1~2경기 못 나가는 건 상관 없는데 장기화 되니 무기력해졌다. 왜 이 곳에 왔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며 "솔직히 한국에 있었다면 지금만큼 욕도 안 들었을 것 같고 뭐든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고 했다.
김기희는 외로웠다. 둘째 출산을 앞둔 아내와 어머니는 한국에 있고 매달 훈련장과 경기장을 찾는 에이전트 외에는 철저히 혼자였다. 김기희는 "가족들이 한국에 있다. 이 곳은 퇴근 후 철저히 개인 생활을 한다. 통역과 차를 마시는 것을 제외하면 항상 혼자 있다"며 "누구에게 기댈 수도 의지할 수도 없었다. 살기 위해선 견디고 버텨야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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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고 또 견뎠다. 그라운드에 서지 못한 대신 훈련량을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잡념을 잊기 위해 매일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7월이 다가오더니 기회가 찾아왔다. 절실한 마음으로 꼭 부여잡았다. 그렇게 최근 4경기 연속 선발 출전이 이뤄졌다. 지난 5일 창춘 야타이전(1대1 무)에선 팀을 패배에서 구하는 극적 동점골도 터뜨렸다. "뭔가 새롭게 눈이 떠진 것 같다고 할까? 그런 기분이었다."
신태용호도 다시 일어선 김기희를 주목했다. 김남일 코치가 현장에서 김기희를 지켜봤다. 김기희는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동안 나 자신을 되돌아봤다. 그간 보지 못했던 부족함이 눈에 들어왔다"며 "내가 한참 경기에 잘 뛸 때 뒤에 있던 선수들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됐다. 축구를 보는 눈,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고난과 좌절은 반드시 선물을 주고 사라진다. 그렇게 터널을 통과하며 그는 내적 성장을 얻었다.
김기희는 다시 한번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신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김기희는 모든 게 조심스럽다. 하지만 의지까지 숨기지는 않았다. 그는 "이런 말을 하면 또 손가락질을 받을 지 모르겠다"라며 "하지만 팬들에게 부족한 선수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다. 혹시라도 기회가 주어지면 더 성장한 모습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임정택 기자 lim1st@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