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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축구 A대표팀을 취재하기 위해 2일부터 9일까지 북한 평양을 다녀왔다. 짧은 기간이었다. 기자의 눈에 비친 평양의 지금은 이랬다.
지난 2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해 베이징을 거쳐 3일 평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연결편이 마땅치 않아 중국에서 하루 체류했기 때문에 한국을 떠나 북한 땅을 밟기까지는 무려 30여 시간이 걸렸다. 남미 대륙에 갈 수 있을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 건 태평양보다 넓은 분단의 벽 때문이었다.
50여 명의 한국 여자축구 선수단과 기자단을 태운 비행기가 3일 오후 평양 순안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2012년 새로 지어진 공항 청사였다. 김일성 초상화가 걸려있을 것으로 예상됐던 공항 상단 가운데 줄에는 '평양'이라는 간판만 걸려있었다. 한국의 중소도시에 자리한 여느 공항처럼 아담한 규모에 익숙한 영어 간판까지…. 평양이라는 글자와 몇 대 보이지 않던 고려항공의 항공기 간판만 없었다면 북한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입국 심사대에는 이미 우리 대표팀 선수들과 중국 승객 등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낯선 '위생실'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내가 진짜 북한에 왔구나. 그 순간이었다. "축구 때문에 오셨죠?" 조금 강한 억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북한군의 황토색 복장을 한 보안원이 말을 건넸다. 다행히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스며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안도감에 긴장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처음 오시는 거겠죠?" 북한식 말투로 묻는 입국 심사대의 관계자. 심상한 표정으로 여권 사이에 꽂아둔 북한 입국 비자에 도장을 찍는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본 입국 심사대의 공항 관계자들과 같은 사무적인 태도였다.
방북 전 받은 교육에선 '노트북을 켜고 여러 내용을 뒤져 본 뒤 트집을 잡을 수 있으니, 웬만한 내용은 모두 삭제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필요한 프로그램을 제외하곤 모든 자료를 지워뒀다. '혹시 문제가 생겨 다시 돌아가라 해도 어쨌든 평양 땅은 한 번 밟아봤구나'하고 생각하며 엑스레이 기기에 짐을 넣었다.
'이건 뭡니까?' 가방을 열어 하나하나 꼼꼼하게 체크하던 중년의 보안원이 불쑥 묻는다. "이건 감기약이고, 이건 간식으로 가져온 과자에요."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말을 하는 사람의 심사를 받고 입국하는 일은 다소 생소한 경험이었다.
이런저런 검사를 마치고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미리 나온 영상·사진 선배들이 자리를 잡고 선수단을 기다리고 있다. 주위엔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는 북한 행인이 보인다. 일부 정장을 입은 북한 사람들은 게이트를 빠져나온 우리의 모습을 촬영하기도 했다.
바쁘게 공항을 빠져나간 선수들과 인터뷰를 한 뒤 잠시 여유가 생기자 북한 관계자들은 기자들을 모아놓고 "민화협 참사 아무개입니다"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소위 연락관이라고 불리는 북한 관계자들이 취재는 물론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통제하거나 지원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사실은 이미 방북 교육을 통해 알고 있던 터였다.
'민족화해협의회'를 줄인 민화협은 김대중 정부 당시인 1998년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와 인연을 맺으며 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교류가 한창이던 이 시기에는 회담이나 민간 교류 시 한국 인사들을 안내하고, 관련 내용을 협상하는 역할도 맡았다고 한다. 민화협 관계자들만 연락관을 맡는 건 아니다. 대부분은 통일전선부나 보위부 등 대남 활동을 하는 조직 관계자들이 민화협이라는 이름 하에 활동하고 있다.
■민화협
민화협 관계자들은 기자단이 북한에 머물며 가장 자주 대화를 나눈 북한 주민이다. 매일 아침 식사를 마치면 선수단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통일부 관계자들과 일정을 결정해 기자단에 알려준다. 하루 일과의 오후 훈련이나 경기 일정에 맞춰 호텔 1층에 모인 뒤 버스를 타고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외부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 경우에는 조금 일찍 호텔을 떠날 때도 있다.
북한 관계자들은 한국의 정치 상황에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한국의 대선과 세월호 사건, 최순실 사태 등에 대한 질문은 평양에 도착한 첫 날부터 계속 이어졌다. 이들은 보통 오전 8시쯤 출근해 오후 6시 30분쯤 퇴근하곤 하는데, 한국의 뉴스를 보는 것이 자신들의 일이라고 했다. 업무가 많은 날에는 야근도 있다고 했다.
북한 관계자들에게 '회사가 광화문 쪽에 있다'고 하자 "전 선생도 광화문에 나가보셨습니까"하고 묻는다. 최근 계속된 촛불시위를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될 것 같습니까", "지난 선거에선 누구를 뽑았습니까", "이번에 누구를 뽑겠습니까"하는 질문들이 이어진다. 이어 "안철수 선생이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선생을 많이 따라잡은 것 같더라", "박근혜가 탄핵당하는 수치스런운 일이 있었는데, 그럼 탄기국(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박근혜가 세월호 때 주사를 맞은 게 사실입니까" 하는 식의 구체적 질문도 서슴지 않는다. '체육부 기자라 잘 모른다'고 하자 "어떻게 기자 선생들이 모를 수 있습니까"하고 웃어 보이기도 했다.
■평양
평양은 극장 같은 곳이다. 영화가 현실의 단면을 보여주지만 진실이 아니듯, 평양은 북한의 일상을 들여다 볼 수 있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기자단이 볼 수 있는 곳은 북한 관계자들의 의도가 반영된 곳으로 김일성-김정일을 찬양하는 선전 문구와 높이 솟은 빌딩, 신식으로 꾸며진 거리 등이었다. 호텔 역시 외국인들이 묵는 호텔이었기에 평양 시민의 진짜 일상을 볼 기회는 없었다. 북한이 의도대로 짜여 진 모습은 마치 극장에 걸린 영화처럼 세련되게 상영되었다. 하지만 이런 스크린은 단지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선전에 불과해 보였다. 진짜 현실은 스크린 뒤에 숨어 있었다.
한국 선수단이 묵은 숙소는 양각도국제호텔로 해외에서 온 여행객 등 외국인이 묵는 곳이다. 대동강 가운데 있는 양각도에 세워진 47층 높이의 고층 빌딩이다. 사실 평양에는 이 정도 규모의 빌딩은 적지 않은데, 피라미드 모양의 105류경호텔도 완공을 앞두고 있다.
류경호텔과 양각도호텔, 주체사상탑은 평양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하지만 대동강 변을 따라 자리한 과학자거리에는 '인재중시 과학중시'라는 구호가 적힌 고층 빌딩이 늘어서 있다. 호텔로 오던 길가의 건물엔 초록빛 핑크빛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고, 창문마다 꽃 등 식물이 심긴 화분이 놓여있었다. 도로는 깨끗했고, 차는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중국의 작은 도시를 연상케 하는 인민복 등 평상복을 입은 시민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평양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북한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하늘에선 손바닥 크기 만하게 보이던 북한의 도시들은 큰 도로를 따라 초록색과 핑크빛 고층 건물이 보였고, 그 뒤로 잿빛 건물들이 하늘에서도 위태롭게 보일 만큼 듬성 듬성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도로 변의 화려한 건물은 큰 길가와 거리를 둔 다수의 건물과 흑백사진처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평양에서 머문 일주일 간 남은 대표적인 느낌은 흑백 대비였다. 호텔 창문으로 보이는 평양과, 방이 없는 반대쪽의 평양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쪽은 고층 빌딩이 대동강을 따라 늘어선 화려한 모습이었던 반면, 다른 편은 둔탁한 소리가 울릴 것 같은 시멘트 건물의 황량한 모습이었다.
평양의 거리는 서울과 비교해 무채색에 가깝다. 화려한 서울의 거리 풍경과 달리, 평양에선 상업광고판을 찾아볼 수 없다. 기자단이 평양에 머무는 동안 볼 수 있었던 광고판은 김일성경기장 내부 그라운드 주위에 배치된 것이 전부였다. 버스 정류장, 건물 외벽, 지하철역 주변에도 광고판은 없었다. 대신 북한의 체제를 선전하는 문구로 가득했고,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구호만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의외로 살아있는 권력자 김정은에 대한 찬양 문구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아직 안정적인 기반을 닦지 못한 탓으로 추정될 뿐이다.
한국 기자단은 평양에서 주로 경기장-호텔만 오갔는데, 외부로 향할 땐 북한 관계자들이 버스 기사에게 어떤 길로 갈지를 정확히 일러준 뒤에야 버스가 출발한다. 양각도국제호텔과 김일성경기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구글 지도 검색을 통해 확인한 결과 평양역을 거쳐 승리역을 지나 만수대를 통과하는 코스로, 15분이 걸린다. 하지만 기자단을 태운 버스는 과학자거리를 지나 여명거리를 통과해 북쪽으로 길게 돌아 영생탑을 따라 내려오는 코스를 이용했다. 30분 정도 소요되는 이 코스를 단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기에 기자단은 "하도 익숙해져 걸어서도 가겠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북한 관계자들이 이런 코스를 택한 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겠다'와 '보여주기 싫은 것은 보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셈이다. 반면 평야에 도착한 3일과 떠난 8일은 순안국제공항을 향하는 길은 한국의 1960년대 시골 풍경과 흡사했다. 도로에는 나물을 뜯는 허름한 차림의 노인이 눈에 띄었고, 페인트 칠이 낡아 곳곳에 금 간 흔적을 드러낸 건물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공항으로 가는 도로는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아 버스가 흔들리기 일쑤였다. 북한 관계자들에겐 '보여주고 싶지 않은 곳'이었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평양에 사는 이들은 짐작컨데 대체로 만족스러운 삶을 보내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외부와의 연결이 철저히 차단되었기에 그들이 비교할 수 있는 건 북한의 다른 도시들 뿐이니 말이다. 북한의 TV 채널은 오직 제한적으로 방영되는 한 개의 채널이 전부였다. 외국인이 묵는 호텔방 안에선 알자지라 등 외국 방송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이 오가는 호텔의 로비와 식당에선 오직 조선중앙티비만이 흘러나올 뿐이다. 조선중앙티비는 평일엔 오후 3시부터 방송을 시작해 김부자 삼대에 대한 철 지난 다큐멘터리나, 북한 체재를 찬양하는 노래가 주를 이룬다.
평양 시민들은 한국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북한의 식량난 등 열악한 상황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사는듯 보였다. 평양에 주로 모여 사는 북한 로동당 수뇌부들은 주민들의 목숨을 건 보위를 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이 도시의 모습에서 '평양 카르텔'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활
북한 사람들에게 직업을 마음대로 선택할 자유는 없다. 실제 평양에서 만난 이들은 학창시절 혹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얻은 직업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기자단이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식당의 봉사원(종업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양에서 식사를 하거나 호텔에 묵을 때 만나게 되는 봉사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장철구평양상업대학 출신이다. 지난해 장철구평양상업종합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이 학교에는 봉사학부, 료리학부, 호텔경영학부 등이 있다. 졸업생들은 학창시절 배운 전공과 관련한 일을 하게 된다. 호텔이나 공항 식당에서 만난 이들에게 "평양상업대학 나오셨나요"하고 물으면 모두 "그렇다"고 대답했다. 요리사들에겐 "평양상업대학 료리학부 나오셨죠"하고 물으면 역시 "그렇다"고 말한다.
5일 평양의 유명 음식점인 옥류관에서 만난 봉사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옥류관의 대표적인 요리인 평양냉면에 곁들인 음식으로 나온 녹두전은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는데, 봉사원에게 비결을 묻자 "30년 동안 녹두전만 만든 료리사의 손맛"이라고 설명했다. 김일성경기장 앞에 자리 잡은 개선문에는 35년 동안 가이드를 맡은 중년 여성이 있었다. 이 중년 여성은 1982년 김일성의 70번째 생일에 맞춰 건립된 이 개선문에 새겨진 문양의 의미와, 숫자의 의미를 능수능란하게 설명했고, 아치 위로 적힌 김일성에 대한 노래를 편안히 불렀다.
직업 선택 뿐만 아니라 내가 살 곳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북한 관계자와 버스에서 대화를 할 때면 '남측 어디에 사냐', '결혼은 했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미혼인 기자는 "요즘은 결혼하기 힘들어서 남측은 조금 늦게 결혼하는 편"이라고 대답했다. '왜 힘드냐'는 대답이 돌아오면 "집값이 비싸서"라는 평범한 대답을 던졌다. "혼자 살고 있는데 월세로 사는 것도 조금 부담이 될 때가 있어요." 기자의 말에 북한 관계자는 "그 집은 나라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북한은 이론적으론 사유재산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모든 토지와 부동산은 국가가 소유한다. 고층 아파트나 저층 주택이나 나라에서 배정한 대로 살아야 한다. 북한 정권이 살 곳을 배정해주면, 주민들은 일부 사용료를 지불하는 식으로 살아간다. 방이 몇 칸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등을 기준으로 배정된다고 북한 관계자는 설명했다. "낮은 곳 말고 저 높은 아파트에 살고 싶으면 어떻게 하냐"고 북한 관계자에 물었을 때 "그런 건 없다"고 간단히 답했다.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는 사고방식이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
결국 북한에서는 개인의 삶 자체보다는 '나라와 당'으로 대표되는 김정은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이 생활 전반을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인터넷
기자단이 북한을 방문해서 가장 놀란 건 카카오톡을 비롯한 페이스북, 구글, 뉴욕타임스, 인스타그램 등 인터넷 접속이 자유롭다 사실이다. 물론 무선인터넷(와이파이)가 잡히는 건 아니었고, 랜선을 통한 광대역 연결 방식으로 인터넷에 접속해야 했다.
평양에선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선 아이디를 따로 발급 받아야 한다. 기자단이 머문 양각도호텔의 아이디는 'yang'으로 시작해 두 자리 숫자로 끝난다. 랜선을 컴퓨터에 연결해도 아이디를 치지 않으면 인터넷 접속이 불가능하다. 이상한 점은 김일성경기장에서도 호텔에서 발급 받은 아이디로 인터넷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인데, 랜선이 설치된 곳이라면 어디든 이 아이디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인터넷 사용은 물론 컴퓨터 활용도 역시 극히 제한적인 북한의 환경상 인터넷 접속 아이디를 통제하는 것 만으로도 시민들의 외부 접촉을 쉽게 차단할 수 있는 셈. 인터넷 자체를 막아놓았기보다는 극소수에게만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기자들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한국에서 사용하던 휴대폰을 맡기고 평양에 왔기 때문에 전화가 가능한지, 스마트폰을 통한 로밍이나 인터넷이 가능할 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호텔과 경기장을 오가며 길거리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기에 휴대폰 보급률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로 추정할 뿐이었다. 기자단을 '일대일' 마크한 북한 관계자들도 핸드폰을 갖고 있었고, 전화가 오면 "여보세요"하며 익숙하게 통화했다. '인터넷은 되는 거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북한 관계자들은 "물론 되지"하고 아무렇지 않게 답하곤 했다. 실제 평양에 머무는 중국 특파원에 따르면, 유심 카드를 장착한 스마트폰은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이나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자는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던 오래된 핸드폰을 평양에 지니고 갔는데, 공항 검문요원은 별다른 검사 없이 한 두 번 보고는 그대로 돌려줬다. 검문요원에게 '이 전화를 쓸 수 있냐'고 묻자 "카드만 사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심 카드 구입은 연락관으로 통칭되는 북한 관계자들이 허락해야 가능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유일하게 접속이 어려웠던 건 한국 사이트에 접속할 때다. 다음이나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는 접속이 가능하지만, 메인 화면 이후로는 진행이 되지 않는다. 북한에서 기사를 써 한국에 카카오톡 메신저로 전송하곤 했지만, 실제 어떻게 보도되었고 포털 사이트에서 어떻게 다뤄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접속이 자유롭지 못한 북한의 웹사이트를 살펴 보았으나 이내 포기했다. 생갭다 찾을 수 있던 웹사이트의 숫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민족끼리나, 구국전선 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대남 선전 사이트는 모두 확인이 가능했지만, 찾아 볼 수 있는 표본 자체가 적었다. 대신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 등에서 '록화보도'라는 제목으로 북측 선전 영상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북한 시민들이 인터넷을 사용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인터넷 매체와 자료들은 해외 체류 중인 북측 주민이나 남측 언론 등 제한적인 대상만을 상대로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공동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