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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의 발품스토리]235일, 1만7190km 자전거로 안필드간 사나이를 만나다

이건 기자

기사입력 2017-02-09 10:44


사진제공=이준규

[리버풀(영국)=이건 스포츠조선닷컴 기자]말그대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한국 나이 25세.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을 나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목표는 영국 리버풀. 정해진 기한은 없었다. 2016년 6월 10일 첫 페달을 밟았다. 영국 리버풀을 향해 출발했다. 1만7190㎞를 달렸다. 1월 30일 목표로 했던 리버풀에 도착했다.

영국 BBC가 그를 주목했다. 리버풀 안필드에 도착하는 그를 찍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한국에서도 이슈가 됐다. 청년에게 고정된 사회의 틀을 거부하고 세상으로 박차고 나간 이유가 궁금했다. 리버풀로 달려가 그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이준규. 2017년 26세가 된 대한민국 청년이다.

대한민국 25세 청년, 남다른 선택을 하다

리버풀과의 첫 만남은 '이스탄불의 기적'이었다. 사실 그 경기를 라이브로 보지는 못했다.

"이스탄불 경기를 보지는 못했어요. 기적의 소식을 들었어요. 그 이후 리버풀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계속 리버풀을 지켜봤죠."

K리그도 좋아한다. 순천이 고향이다. 전남 드래곤즈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틈만 나면 광양으로 갔다. 전남의 경기를 지켜봤다. 축구도 하고 싶었다. 형편이 안 좋았다. 아쉽게 꿈을 접었다.

광주에서 대학을 다녔다. 치기공을 전공했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임플란트, 금니 등을 만들었다. 좋은 일이었다. 다만 활동적인 이씨와는 맞지 않았다.


이준규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리버풀(영국)=이건 스포츠조선닷컴 기자
2015년 6개월간 독일 뉘른베르크로 교환연수를 가게 됐다. 전환점이었다. 독일은 치기공에 있어서도 모든 환경이 좋았다. 나름 인정받았다. 하지만 마음이 차지 않았다.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운동이었다. 일과 후 여유있게 축구 등 각종 스포츠를 즐기는 생활이었다. 행복했다.


한국으로 온 뒤 다시 유럽에 돌아가고 싶었다. 일단 자신이 좋아하는 리버풀까지 여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단순한 배낭 여행이 아니었다. 자신의 온전한 힘으로 가고 싶었다. 자신의 근육으로, 자신의 힘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자전거였다.

2015년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 3명가 함께 모여 살았다. 돈을 준비해야 했다. 어린 시절 받은 새뱃돈을 차곡차곡 모은 통장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 아르바이트비 그리고 군 복무시절 월급까지 모았다. 1300만원이 있었다. 서울에서 여러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생활비를 제하고 300만원을 모았다.

체력도 필수였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운동을 시작했다. 말그대로 달밤의 체조였다. 그래도 즐거웠다. 뛰고 또 뛰었다. 2016년 5월 리복에서 주최한 스파르탄 레이스에 나갔다. 자신의 체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5㎞코스에 도전했다. 목표는 3등이었다. 부상으로 트레이닝복 등 100만원 상당의 용품이 걸려있었다. 열심히 뛰었다. 그런데 뛰다보니 조금 길어진 것 같았다. 길을 잘못 들었다. 5㎞가 아닌 10㎞코스로 진입했다. 결국 입상권에 들지는 못했다. 그래도 완주했다. 체력에는 합격점을 내렸다.

멘토도 필요했다. 자전거 여행가 황인범씨를 찾아가 조언도 구했다. 가장 궁금한 것은 역시 '돈'이었다. 얼마나 들지가 궁금했다. 황씨는 "이것저것 걱정하면 여행이 아니다. 그냥 마음이 떨릴 때 출발해라. 순수한게 가는 것이 여행이다"고 했다. 그동안의 걱정과 근심이 눈녹듯이 사라졌다.

"다 포기하게 되더라고요. 내려놓았다는 말이 맞겠죠. 내가 할 수 있는만큼 아끼고 절약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돈없으면 텐트에서 자고조금 덜 먹기로요.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이준규씨가 올린 출사표. 이준규 인스타그램
6월을 출발일로 잡았다. 이씨 자신의 영어이름인 준(June:영어로는 6월)에서 착안했다. 여행 한달 전 부모님께 사실을 알렸다. 부모님들은 별로 동요하지 않았단다. 조심히 잘 다녀오라고만 했다.

모든 준비를 마쳤다. 디데이는 2016년 6월 10일이었다. 인천항에서 중국 톈진으로 향하는 배를 타기로 했다. 출발을 이틀 앞둔 8일 서울시청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렸다. 출사표였다.

'대한민국 25살. 앞으로 먹고 살기 위해 이것 저것해야 할 것이 많은 나이. 나는 다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여행을 출발한다. 이 여행 끝나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어떠한 스펙도 얻지 못할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단지 하고 싶을 것을 하는 나에 대한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진제공=이준규
어려움 그리고 위험

쉽지는 않은 길이었다. 중국-몽골-러시아-카자흐스탄-다시 러시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나이나-폴란드-체코-독일-네덜란드-벨기에를 거쳐 영국으로 갔다.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은 다반사였다. 중국 다퉁으로 가는 길이었다. 중국에서는 대형 트럭은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없다. 자전거가 다니는 일반 도로를 이용했다. 다퉁은 광산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가는 길이 먼지투성이었다. 대형 트럭들과 함께 길을 달린 뒤 다퉁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 스태프들이 다 놀라는 모습이었다. 방에 들어가 욕실로 향했다. 거울에는 선글라스 부분만 빼고 새까맣게 먼지를 뒤집어쓴 이씨가 서 있었다. 베이징 텐안먼 광장에서는 자전거에 달았던 태극기가 사라지기도 했다.


사진제공=이준규
몽골 고비사막을 지나던 길에도 사건이 있었다. 몽골에서 만난 친구가 "준, 총이나 칼 등 호신용품 있어?"라고 물었다. 늑대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 이씨는 "괜찮다.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리고 사막으로 나갔다. 들개 3마리와 마주쳤다. 자신들이 사냥한 야생소를 먹고 있었다. 그 중 한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개들이 이씨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기겁한 이씨는 그 어느때보다도 빨리 페달을 밟았다. 때마침 지나가던 트럭이 경적을 크게 울렸다. 그 덕분에 개들을 쫓을 수 있었다.

몇몇 대형 트럭 기사들도 위험했다. 일부러 이씨옆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트럭들이 있었다. 그럴때마다 이씨는 휘청거릴 수 밖에 없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노숙은 일상다반사였다. 특히 러시아로 넘어온 뒤에는 노숙이 많아졌다. 비가 많이 오면 폐차량에 들어가 텐트를 쳤다.


사진제공=이준규
발트해 3국을 지날 때였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도로에는 살얼음이 얼어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그 살얼음들이 자전거로 튀었다. 철 제질의 자전거에게 살얼음은 쥐약이었다. 달라붙어 얼었다. 기어에 붙으면 낭패였다. 기어를 바꾸지도 못하고 그대로 나아가기도 했다. 추운 날씨도 문제였다. 달릴 때는 몰랐다. 잠시 쉬려고 멈추면 찬기운이 몸안을 그대로 찔렀다. 저체온증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씨는 꿋꿋하게 자전거로 나아갔다. 235일 1만7190㎞동안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한 것은 딱 2번, 350㎞뿐이었다. 처음은 러시아 바이칼호수 근처였다. 자전거 타이어가 터졌다. 스페어 타이어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인근 이르쿠츠크까지 200㎞를 기차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자전거를 고쳤다. 두번째는 폴란드 비알리스토크였다. 저체온증으로 몸이 계속 말을 안 들었다. 눈도 심해졌다. 이러다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기차를 타고 150㎞ 떨어진 바르샤바로 향했다.

"나한테 떳떳하고 싶었어요. 물론 중간에 기차를 타고 이동할 수도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 말만 안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나 자신은 그걸 알잖아요. 내가 세운 규칙이니까 그것을 따르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두 차례 350㎞를 기차타고 가면서 '이러면 안되는데' 라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그래도 그 외에는 다 제 힘으로 왔으니까 조금은 만족해요."


사진제공=이준규
결국은 사람

어렵고 힘든 길을 견디게 해준 것은 역시 사람이었다. 이씨는 여행 중에 정말 좋은 사람만 만났다고 했다.

처음부터 잘 풀렸다. 톈진으로 가는 배안에서였다. 4인실에 들어갔다. 함께 방을 쓴 중국인이 자전거 여행가였다. 제주도를 자전거로 일주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씨에게 톈진에서 내리자마자 '환영식' 조로 밥을 거하게 쐈다. 베이징에 오면 자신의 집에서 머물라고 했다. 베이징에서 다시 만났다. 소중한 인연이 됐다.

몽골에서도 친구를 사겼다. 중국에서 몽골로 넘어간 직후였다. 자전거에 문제가 생겼다. 숙소로 갔다. 손짓발짓으로 자전거 부품 살만한 곳을 수소문했다. 공구점에 갔다. 사장이 이
사진제공=이준규
씨 또래였다. 몽골인 사장은 이씨에게 내일부터 자신의 거처에서 지내라고 했다. 3일을 그곳에 있었다. 같이 일하고 밥먹고 대화하고 축구도 했다. 고비사막을 넘어가는 법도 알려줬다. 울란바토르 가는 길에 사는 친구들과도 연결해줬다. 이씨는 몽골에 있는 대부분 그 친구들 집에서 머물렀다.

신기한 인연도 있었다.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흡스굴 호수로 가는 길이었다. 아스파트길이 중간에 끊겼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정처없이 나침반을 보고 가고 있었다. 멀리 한글 이정표가 보였다. '어기노르의 숲 16㎞' 믿기지 않았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어기노르의 숲쪽으로 갔다. 길가에서 현지인을 만나면 "어기노르?"만을 외쳤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한국 기업의 자원봉사장소였다. 사막을 숲으로 바꾸는 곳이었다. 한국 기업이 총괄이었다. 두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3일간 머물렀다. 나무를 심고 물을 부었다.


사진제공=이준규
흡스굴 호수를 봤다. 다시 울란바토르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멀리 '한국 마을 버스'가 한 대 보였다. 몽골은 수입을 많이 하는 나라다. 이씨도 속으로 '한국에서 마을버스도 수입해서 쓰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신기해서 그 마을 버스 쪽으로 향했다. 한국 아저씨들이 있었다. 마을 버스로 세계 일주를 하는 분들이었다. 이미 다큐멘터리를 통해 유명해진 '은수버스'였다. 당시만 해도 이씨는 이들을 몰랐다. 10여분간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서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정도 느꼈다. 러시아 우랄산맥을 넘어갈 때였다. 기온이 섭씨 5도로 떨어졌다. 추운 가운데 빨리 갈 길을 재촉할 수 밖에 없었다. 해까지 떨어지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점심 식사는 최대한 간단하게 했다. 가게에 들어가서 쿠키 하나 정도 사먹고 이동하곤 했다. 그럴때마다 러시아 가게 주인 주인들은 항상 차를 내주곤 했다. 도로 위 트럭 휴게소에서 씻고 있을 때면 트럭 기사들이 다가오곤 했다. 그리고는 차에 올라타란다. 자신이 먹고 있는 점심상을 내주곤 했다.

러시아에서 있다가 잠시 카자흐스탄으로 넘어가기 직전 일이었다. 러시아 오렌부르크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 호스텔 사장은 자전거 여행자에게 돈을 받지 않고 하루 재워주곤 했다. 시내 카페로 나섰다. 커피를 한잔했다. 카페 사장이 돈을 내지 말라고 했다. 그걸로 여행 스폰서를 해주겠다고 했다. 이씨는 이것은 돈을 낼테니 내일 아침에 공짜 커피 한잔을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카페 사장은 흔쾌히 승낙했다. 다음날이 됐다. 이씨는 카페에 들렀다. 사장은 없었다. 종업원이 커피와 함께 도넛까지 내줬다. 커피 가루 선물도 줬다. 너무나 감사했다. 커피를 마시고 카자흐스탄으로 내려갔다. 길을 잘못 들었다. 50㎞나 달렸는데 다른 길로 왔다. 어쩔 수 없이 오렌부르크로 돌아갔다. 카페 사장이 있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 카페 사장은 이씨에게 "혹시 스폰서가 있냐"고 물었다. 이씨에게 스폰서는 없었다. 그러더니 몇군데 전화를 돌렸다. 러시아 내 스포츠용품 유통업체인 트라이얼스포츠 관계자를 연결시켜줬다. 러시아에 있는 내내 트라이얼스포츠에서 자전거 용품을 무료로 제공해주겠다고 했다. 스폰서였다.

가슴 찡한 만남도 있었다. 러시아 사라토바로 가는 길이었다. 차가 한 대 지나갔다. 그러더니 이씨 앞에서 섰다. 운전자가 내렸다. 동양인이었다. 이씨를 향해 달려왔다. "내 나라! 내 나라!"라고 외쳤다. 러시아 교포 2세였다. 부산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차타고 가다가 자전거에 달린 태극기를 보고 내렸단다. 우리말을 잘하지는 못했다. 단어 몇개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했다. 한국인의 긍지를 느꼈다.

이 외에도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은 많았다.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자전거 여행자를 위한 숙소 공유 사이트인 웜샤워 호스트들은 다들 친절했다.

이씨도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가고 싶어하는 곳을 물었다. 자신의 여정에 있는 곳이라면 '이벤트'를 준비했다. 그곳을 대표하는 엽서를 산 뒤 그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그 배경과 엽서를 함께 찍었다. 그 사진을 그 사람에게 선물로 보내줬다.

"정말 여행의 목적은 사람이에요. 좋은 분들과의 만남을 잊지 못합니다. 그분들에게 받은만큼 저도 더 많이 베푸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어요."


사진제공=이준규
세계의 축구

이씨 여행의 첫 목적은 리버풀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여행을 다니면서 축구를 보기로 했다. 경기를 보는 것에는 큰 욕심이 없었다. 훈련장에 관심이 컸다. 여행을 떠나면서 자신의 장래 진로를 '축구 전술 분석'쪽으로 잡았다.

틈이 날때마가 축구를 했다. 친구들과 볼을 찼다. 그리고 유럽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축구 구장 혹은 훈련장을 방문했다. CSKA 모스크바, 스파르타모스크바, 제니트상트페테러부르크, 탈린,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에인트호번, 페예노르트, 토트넘, 아스널의 경기장 혹은 훈련장을 무작정 찾아갔다.


사진제공=이준규
첫 날에는 다들 잡상인 취급을 했다. 아스널은 훈련장 근처에도 못오게 했다. 첫 날이 안되면 둘째날, 셋째날도 갔다. 그렇게 훈련장 앞에 있으면 관계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레오니드 슬러츠키 CSKA 모스크바 감독을 잊지 못했다. 슬러츠키 감독은 이씨를 보더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A매치 기간 중이라 선수들도 많지 않았다. 함께 대화를 나눴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오범석'을 얘기했다. 오범석이 러시아 사마라에서 뛰던 당시 그 팀의 감독이었다. 오범석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진제공=이준규
네덜란드 로테르담 페예노르트도 좋은 기억이었다. 경기장과 훈련장이 붙어있었다. 훈련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수단이 미니 버스를 타고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선수단은 이씨를 보더니 창문으로 손을 흔들어줬다. 이씨는 디르크 카윗을 외쳤다. 카윗은 리버풀에서 뛰었다. 카윗은 훈련장 관계자에게 말을 전했다. 여기에 있지 말고 경기장 앞에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시간이 흐른 뒤 카윗이 나타났다. 사인도 해주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구자철, 지동원과 만났다. 그들은 이씨가 자전거로 여행중이라는 말에 많은 격려를 해줬다. 런던에서는 토트넘 훈련장인 스퍼스웨이로 갔다. 다만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맨시티 경기 하루 전이었다. 토트넘 선수들은 모두 맨체스터로 올라간 상태였다. 아쉽게도 앞에서 사진만 찍었다.


사진제공=이준규
리버풀

올해 1월 18일 이씨는 영국에 들어왔다. 원래 런던을 거쳐 스완지-레스터-맨체스터를 찍고 리버풀에 들어가려했다. 하지만 독일에서 다친 무릎이 말썽이었다. 통증이 계속 됐다. 바로 리버풀로 가기로 했다. 북런던만 찍고 옥스퍼드, 코벤트리를 거쳐 체스터까지 향했다.

체스터에서 또 하나의 인연을 만났다. 웜샤워 호스트였다. 그는 은퇴 후 웜샤워를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으면 지역 신문사와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다. 이씨의 사연은 그 호스트의 구미를 당겼다. 리버풀 지역 신문사에 이씨의 이야기를 보냈다. 이를 BBC노스웨스트가 읽고 이씨에게 연락했다. BBC라디오에서도 연락이 왔다. 그렇게 이씨는 BBC를 장식했다.

1월 30일 리버풀에 들어왔다. 안필드와 멜우드 훈련장을 밟았다. 폭풍 오열할 것이라 생각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생갭다 담담했다.

"공식적인 여행은 여기서 끝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한국을 떠난 지 235일. 1만7190㎞의 여정이 여기에서 끝났다.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했다

이제 이씨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 일단은 축구를 조금 더 알아갈 생각이다. 에든버러를 가는 것도 그곳에서 열리는 지도자 과정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목표는 총 3차례 축구 지도자 과정을 듣는 것이다.

때문에 아직 한국으로 돌아가는 시간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은 결정하지 않았다. 여러가지를 고민 중이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돌아갈 수도, 아니면 기차, 버스를 타고 갈수도 있다. "조금씩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리버풀에서 마련한 선물을 놓고도 고민 중이다. 리버풀은 이씨의 사연을 듣고 11일 열리는 리버풀-토트넘 입장권을 준비했다. 이씨는 8일 이미 에든버러를 향해 출발했다. 물론 자전거를 타고서다. 지도자 과정 일정을 맞춰야 했다. 리버풀 경기를 보고 가면 잠시 자전거를 놓아두고 버스를 타고 왔다갔다해야 한다.

"좋은 선물을 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그냥 전 자전거로 여행을 했을 뿐인데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과분합니다. 이번 경기도 아직 고민 중이에요. 리버풀도 좋고요. 손흥민 선수 뛰는 것도 보고 싶고요. 그래도 일정이 있으니까 조금만 더 생각해보려고요."

이씨에게 이번 여행을 정의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렵네요. 정의를 하자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잘한 여행'이랄까요."

무엇이 남았는지도 물었다. 주저없이 답변이 나왔다.

"계속 여행을 하면서 항상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성공하고 싶으면 상상할 수 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 노력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죠. 대부분은 사회가 정한 잣대를 들이대더라고요. 공부를 해야 한다는지 스펙을 쌓아야 한다든지요. 그런데 제 생각은 달라요. 엄청난 노력은 하되 자기 자신이 잘할 수 있고 즐길 수 있으며 맞는 것을 찾아야 해요. 그런 것을 찾아서 최대한의 노력을 하면 뭔가 되지 않을까요. 이 생각을 많이 했어요."

독자들에게 꼭 했으면 하는 말도 부탁했다. 그러자 이씨는 영화 '이메테이션 게임' 갱을 맡았던 그레이엄 무어를 말했다. 그가 2015년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산한 뒤 밝힌 소감을 읊었다.

"이런 말을 항상 마음에 담고 있어요. 그레이엄 무어가 한 말이거든요. So I would like for this moment to be for that kid out there who feels like she's weird or she's different or she doesn't fit in anywhere. Yes, you do, I promise you do. Stay weird, stay different. And then when it's your time, and you are standing on this stage, please pass the same messages to the next person who comes along.(지금 이순간 나는 '난 이상해, 난 달라. 난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아'라며 있을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그래 맞아요. 정말 그렇다고 말할 수 밖에 없네요. 하지만 계속 이상하게, 계속 다르게 있어주길 바랄께요. 그리고 당신의 차례가 오면 그때는 당신이 이 무대에 서는 거에요. 그리고 내가 한 이야기를 다음 사람에게 전해주세요.). 분명 저는 달라요. 보통의 삶은 아니죠. 항상 이 말 의미를 되새기면서 살아왔고 여행을 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어딘가 나를 항상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족들도 그렇고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많은 분들이 차에서 내려서 응원의 말을 전해주셨죠. 새롭게 도전하는 많은 분들께 이 말을 전해주고 싶네요. 누군가 나를 응원해주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가는 길이 남들과는 다르더라도 내 방식을 믿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마시고 도전을 계속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다보면 나도 언젠가 다음 사람에게 똑같은 격려를 할 시간이 있을 거에요.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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