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막 내린 박지성 시대, 추억과 역사가 된 그에게

박아람 기자

기사입력 2014-05-15 14:47



2년 전 여름, 서른둘 장년은 10년 전 그날처럼 옛 스승의 품에 안겼다(사진 하). 2002 한일월드컵 당시 스물둘이었던 청년은 이영표의 크로스를 가슴으로 받아 놀라울 만큼 침착하게 결승골을 뽑아낸다. 그렇게 히딩크 감독의 품에 안긴 뒤 십수 년간 수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해 겨울, PSV 아인트호벤(PSV)의 유니폼을 입었다. 2005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에 입성했다. 2012년 퀸즈파크레인저스(QPR)를 거친 뒤 2013년 PSV로 돌아가 마지막 시즌을 보냈다. 그리고 어제(14일) 오전, 박지성은 담담하게 축구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유럽 생활이 녹록했던 건 아니다. 부상과 맞물린 홈팬의 야유에 히딩크 감독은 원정 경기에만 투입하는 배려를 보인다. 잉글랜드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를 향한 격려의 눈빛 이면엔 '저 왜소한 동양 선수가 맨유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라는 삐딱한 시선도 존재했다. 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 튕겨 나가며 피지컬을 지적받기 일쑤였고,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벤치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나니, 안데르손, 발렌시아, 애슐리 영, 필 존스의 영입 건은 말할 것도 없고, 실제 맨유 유니폼을 입지 않은 선수들의 이적설에도 어김없이 '박지성 위기설'이 등장했다. 그는 '위기'라는 단어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남자였다.

그토록 치열한 세계 속에서 박지성은 생존 방식을 터득해나갔다. 맨유의 일원이 된 것만으로도 대단하거늘 알렉스 퍼거슨이라는 세계적 명장과 무려 7년을 함께하는 영광을 누린다. 무릎 수술로 이탈한 시즌 외엔 선발이든, 교체든 꾸준히 중용 받는 레귤러 멤버였다. 어느 리그, 어느 팀이든 불필요한 선수를 잡아 두는 경우는 없다. 그간 맨유를 거쳐 간 숱한 선수들을 돌아봐도 잘 알 수 있는 부분. 그런 팀에서 살아남은 위업은 감탄을 넘어 전율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공간을 활용하는 영리함과 상대를 숨 막히게 하는 성실함은 퍼거슨 감독이 주요 승부처마다 요긴하게 활용한 전술적 포인트였다.

목숨만 연명하며 버틴 게 아니다. 2007, 2008, 2009, 2011 EPL 우승컵을 총 네 번이나 들어 올렸고, 2008년에는 챔피언스리그(결장)와 클럽월드컵도 품었다. 총 205경기에 나서 27골 26도움을 기록했고, 빅4로 불리는 팀들을 상대로 연이어 골을 터뜨리며 강팀 킬러의 면모도 보였다. 어디 그뿐인가. 현시대 최고로 꼽히는 메시도, 유로 2012 핫 플레이어 중 하나였던 피를로도 꽁꽁 묶어냈다. 박지성은 꼬리표 마냥 붙어 다녔던 '위기설'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전 세계 맨유 팬들의 가슴을 울렸다. 당시 8천 km는 더 떨어진 대한민국 땅에서 '박지성 맨체스터U(잉글랜드)'라는 중계방송 문구를 자랑스러워한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박지성'이라는 이름 석 자를 새길 수 있었던 이유를 곱씹어본다. 뛰어난 축구 지능으로 임무를 소화해내기도 했지만, '두 개의 심장'으로 불린 엄청난 활동량이 없었다면 이마저도 불가능했다. 늘 한 발자국 더 뛰었던 헌신은 본인을 소리 없는 영웅으로 만들었지만, 무릎 통증이라는 고질병을 유발했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장거리 비행까지 감수하면서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2006 월드컵, 2010 월드컵은 물론, 월드컵 예선 및 평가전을 위해 세계 곳곳을 누빈 것이 치명적이었다. 2010년 맨유 의무진은 "축구 선수의 무릎으로는 5년 정도 버틸 수 있다"라며 "대표팀을 오가며 장거리 이동을 자주 하면 2년으로 줄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2012년 여름, QPR로 둥지를 옮긴다. 그라운드에 더 많이 서기 위한 새로운 도전, 철저히 '축구선수'다운 선택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순 없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박지성도 자유롭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한창때의 플레이를 기준으로 잔인하게 평했다. 예전만 못한 플레이에 또 다시 '위기설'을 운운했을 땐 이 선수에게 연민마저 들었다. 이들은 한국 나이로 서른셋인 박지성만큼은 '시간을 거스르는 자'이길 원했다. 1년 뒤 PSV로 임대를 떠난 그는 마지막 시즌을 보낸다. 마르셀 브란즈 PSV 기술이사는 "지난 몇 달간 수행했던 일은 끔찍한 고통이었고 본인도 그렇게 느꼈다"라며 무릎 상태를 설명했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은 선수다. 아시아인 최초 월드컵 3개 대회 연속 득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선발 출장 및 우승 등 나열할 커리어가 한두 줄이 아니다. 하지만 정녕 중요한 건 '기록'으로 논할 수 있는 선수가 아니란 점이다. 차범근이란 역사를 들고, 박지성이란 전설을 보며 자란 세대가 그다음 길을 잇고 있다. 한국 축구를 바라보는 국외의 시선을 바꿔놓았음은 물론, 우리가 내다보는 축구의 차원을 몇 단계는 더 높였다. 대한민국 축구선수로서 한 개인이 미칠 수 있는 최대 영향력이 아니었을까. 그런 그가 이제는 떠난단다. 추억과 역사가 된 박지성에게 그저 감사할 뿐. 동시대를 살며 그 플레이를 생생히 지켜본 건 크나큰 행운이었다. <홍의택 객원기자, 제대로 축구(http://blog.naver.com/russ1010)>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당신이 좋아할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