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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여름, 서른둘 장년은 10년 전 그날처럼 옛 스승의 품에 안겼다(사진 하). 2002 한일월드컵 당시 스물둘이었던 청년은 이영표의 크로스를 가슴으로 받아 놀라울 만큼 침착하게 결승골을 뽑아낸다. 그렇게 히딩크 감독의 품에 안긴 뒤 십수 년간 수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해 겨울, PSV 아인트호벤(PSV)의 유니폼을 입었다. 2005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에 입성했다. 2012년 퀸즈파크레인저스(QPR)를 거친 뒤 2013년 PSV로 돌아가 마지막 시즌을 보냈다. 그리고 어제(14일) 오전, 박지성은 담담하게 축구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목숨만 연명하며 버틴 게 아니다. 2007, 2008, 2009, 2011 EPL 우승컵을 총 네 번이나 들어 올렸고, 2008년에는 챔피언스리그(결장)와 클럽월드컵도 품었다. 총 205경기에 나서 27골 26도움을 기록했고, 빅4로 불리는 팀들을 상대로 연이어 골을 터뜨리며 강팀 킬러의 면모도 보였다. 어디 그뿐인가. 현시대 최고로 꼽히는 메시도, 유로 2012 핫 플레이어 중 하나였던 피를로도 꽁꽁 묶어냈다. 박지성은 꼬리표 마냥 붙어 다녔던 '위기설'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전 세계 맨유 팬들의 가슴을 울렸다. 당시 8천 km는 더 떨어진 대한민국 땅에서 '박지성 맨체스터U(잉글랜드)'라는 중계방송 문구를 자랑스러워한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박지성'이라는 이름 석 자를 새길 수 있었던 이유를 곱씹어본다. 뛰어난 축구 지능으로 임무를 소화해내기도 했지만, '두 개의 심장'으로 불린 엄청난 활동량이 없었다면 이마저도 불가능했다. 늘 한 발자국 더 뛰었던 헌신은 본인을 소리 없는 영웅으로 만들었지만, 무릎 통증이라는 고질병을 유발했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장거리 비행까지 감수하면서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2006 월드컵, 2010 월드컵은 물론, 월드컵 예선 및 평가전을 위해 세계 곳곳을 누빈 것이 치명적이었다. 2010년 맨유 의무진은 "축구 선수의 무릎으로는 5년 정도 버틸 수 있다"라며 "대표팀을 오가며 장거리 이동을 자주 하면 2년으로 줄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은 선수다. 아시아인 최초 월드컵 3개 대회 연속 득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선발 출장 및 우승 등 나열할 커리어가 한두 줄이 아니다. 하지만 정녕 중요한 건 '기록'으로 논할 수 있는 선수가 아니란 점이다. 차범근이란 역사를 들고, 박지성이란 전설을 보며 자란 세대가 그다음 길을 잇고 있다. 한국 축구를 바라보는 국외의 시선을 바꿔놓았음은 물론, 우리가 내다보는 축구의 차원을 몇 단계는 더 높였다. 대한민국 축구선수로서 한 개인이 미칠 수 있는 최대 영향력이 아니었을까. 그런 그가 이제는 떠난단다. 추억과 역사가 된 박지성에게 그저 감사할 뿐. 동시대를 살며 그 플레이를 생생히 지켜본 건 크나큰 행운이었다. <홍의택 객원기자, 제대로 축구(http://blog.naver.com/russ1010)>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