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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서울 연고의 어제와 오늘

박상경 기자

기사입력 2014-04-09 10:43


◇지난 2000년 5월 21일 목동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부천-울산 간의 K-리그 경기에서 윤정춘(왼쪽)과 김상훈이 볼을 다투고 있다. 당시 부천은 목동종합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목동=김경민 기자 kyungmin@sportschosun.com

프로축구의 천만수도 서울 입성 원년은 1990년이다.

프로축구계는 출범 초부터 시행해 온 광역지역연고제를 흥행실패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1989년 10월 16일 프로축구 특별위원회는 이듬해부터 공식적으로 도시 지역 연고제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첫 서울 연고의 주인은 일화천마(현 성남FC)다. 1989년 서울 도시 연고 참가를 조건으로 창단했다. 강원도를 연고로 했던 현대호랑이(현 울산)를 비롯해 충청도의 럭키금성(현 서울), 인천-경기의 유공(현 제주)이 서울 연고를 원하고 있었다. 이 중 럭키금성이 1990년, 유공이 1991년 각각 서울 연고에 입성했다. 지역 연고 시행 원년 서울 연고팀은 3팀이 됐던 셈이다.

효과는 그대로 드러났다. 지역연고 시행 이후 프로축구 관중은 2배가 넘는 성장세를 기록했다. 지역 정착 노력도 적극적이었다. 서울 연고팀이던 일화와 럭키금성, 유공은 1992년 함께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동대문운동장에서의 경기를 공동으로 집중 홍보하면서 관중몰이를 시작했다. 1992년 한 해에는 3개 구단 연간회원권을 각각의 홈 경기에 공통 사용할 수 있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3개 구단이 서울 연고를 쓰면서 자연스럽게 경기 개최일도 늘어났고, 팬들의 관심도 집중됐다. 서울은 바야흐로 프로축구의 메카였다.

서울 연고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이후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전이 전개되면서 프로축구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구조조정 타깃으로 지목된 곳이 3팀이 몰려 있었던 서울이다. 지방 축구 활성화 및 지역연고 정착을 이유로 들어 3팀을 지방으로 분산시키기로 했다. 축구전용구장 건립을 약속하면 서울 연고 복귀를 허용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연고지를 잃은 것도 모자라 막대한 예산까지 부담하는 조건을 내건 정책에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팬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기도 했다. 이럼에도 서울은 연고팀 없는 중립경기지역으로 남아 2003년까지 컵대회 등 일부 경기를 개최하는 데 그쳤다.

2004년 서울은 다시 주인을 찾았다. 정책의 희생양으로 자의반 타의반 연고를 이전해야 했던 안양LG가 서울 연고 재입성을 선언하며 FC서울로 새출발 했다. 최대 흥행시장을 독점한다는 비판도 일었지만,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전당인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의 활용 문제 뿐만 아니라 연고팀 없는 수도에 대한 문제점 해결이라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논란이 가라앉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울은 조광래, 세뇰 귀네슈 등 인지도 높은 명장들 밑에서 박주영 이청용 기성용 데얀 등 스타 선수들을 잇달아 배출하면서 바람몰이를 했다. 적극적인 마케팅을 전개하면서 K-리그 최다관중 기록을 갈아치웠다. 2010년 5월 5일에는 프로축구 사상 첫 한 경기 6만 관중 돌파(6만747명)의 대기록을 썼다. 2차례 K-리그 우승(2010년·2012년), 2013년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준우승(ACL) 등 K-리그 대표구단의 명성도 쌓았다. 하지만 서울 외곽에 위치한 서울월드컵경기장의 한계로 팬층이 일부 지역에 쏠린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었다. 시너지 효과를 위해서는 프로야구 LG-두산 처럼 건전한 경쟁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제2의 서울연고 구단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이랜드그룹의 2015년 프로축구단 창단 선언은 천만수도 서울이 20여년 만에 프로축구 메카의 위상을 되찾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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