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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터닝포인트, 차두리 서울 유니폼 입기까지…

김진회 기자

기사입력 2013-03-25 16:26 | 최종수정 2013-03-26 08:33



차두리는 1980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차붐' 차범근(SBS 축구해설위원)이 당시 독일 분데스리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맹활약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차두리는 어린 시절 독일 유소년 팀에서 공을 찼다. 이후 1990년 아버지와 함께 귀국한 뒤 양정초, 배재중, 배재고를 거쳐 사학명문 고려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줄곧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뛰었다. 아버지의 탁월한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스피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차두리의 축구 인생은 2001년부터 꽃을 피기 시작했다. 선수 인생에서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 고려대 재학시절 A대표팀과의 연습경기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의 눈을 사로잡았다. 차두리는 곧바로 히딩크호에 합류했다. A매치 데뷔는 11월 8일 세네간과의 친선경기였다. 차두리는 이듬해 한-일월드컵 최종명단에도 깜짝 발탁됐다. 당시 대표팀 막내였다. 플레이는 정교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찼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1-1로 팽팽하게 맞서던 후반 종료 직전 날린 오버헤드킥은 축구 팬들에게 아직도 회자되는 장면이다. 차두리는 월드컵 4강 신화 뒤 해외로 눈을 돌렸다.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르 레버쿠젠에 둥지를 틀었다. 차두리는 곧바로 빌레펠트로 임대돼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2003~2004시즌에는 아버지의 친정팀인 프랑크푸르트에서 임대선수로 뛰었다.

2004년 여름, 프랑크푸르트로 완적 이적한 차두리는 2년 뒤 두 번째 전환점을 맞았다. 공격수에서 오른쪽 윙백으로 변신했다. 시행착오는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점차 수비수로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자리매김했다. 차두리는 마인츠, 코블렌츠, 프라이부르크를 거쳐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기성용과 함께 스코틀랜드 셀틱에서 활약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저돌적인 플레이로 인기몰이를 했다. '로봇'과 비교돼 '차미네이터'란 별명을 얻었다. 2012~2013시즌에는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뒤셀도르프 유니폼을 입었다. 7년 만에 공격수로 살짝 외도했지만, 역시 윙백이 그의 자리였다. 2013년은 차두리의 세 번째 터닝포인트다. 마지막 종착역은 K-리그 클래식 FC서울이다. 지난 12년간 돌고 돈 차두리의 축구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김진회 기자 manu35@sportschosun.com


그래픽=김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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