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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 모르는 고집센 장인 조광래와 김성근의 닮은꼴 인생

민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1-12-08 15:28


조광래 A대표팀 감독. 스포츠조선 DB

자기 색깔이 확실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 간다. 소신이 또렷하다보니 주위 사람들과 충돌하기도 하지만 굽히지 않는다. 빛나는 성과, 밝은 미래를 향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데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기도 한다. 자기 분야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누구보다 뛰어나고, 누구보다 비범하지만 타협을 모르기에 늘 주류에 편입될 수 없는 비주류다.

이쯤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6일 축구대표팀 사령탑에서 전격 경질된 조광래 감독(57)과 지난 8월 프로야구 SK 와이번스 지휘봉을 놓은 김성근 감독(69·현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 감독)은 타협을 모르는 닮은꼴 인생이다. 굴곡이 있었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났다가 다시 좌절을 맛봤다. 정작 중요한 순간, 두둔하고 옹호해줄 방패막이가 없었다.

40년 넘게 축구와 씨름해온 조광래는 가장 굴욕적인 모습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대한축구협회는 "조광래 체제로는 2014년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예선을 통과하더라도 앞으로 한국축구가 힘들 거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지난 1년 5개월 간 내세웠던 짧고 정확한 패스와 빠른 템포를 앞세운 조광래의 '만화축구'에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다. 조광래는 "한 경기도 기다려줄 수 없는 거냐"며 분노했다.

'야신' 김성근도 큰 상처를 안고 팀을 떠나야 했다. 2007년부터 특색없는 야구를 하던 SK를 세 차례나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놓았다. 처음 우승했을 때 고마워하던 구단 프런트는 자기 주장이 김성근을 부담스러워했다. 전지훈련 때면 김성근은 좀 더 많은 선수를 데려가고 싶어했고, 좀 더 긴 일정을 원했다. 그때마다 구단은 비용을 얘기했다. 한쪽에서는 성적은 내도 재미없는 야구를 한다고 수근거렸다. 짧게 끊어치고, 많이 뛰며, 작전에 따라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조직력 야구를 스케일이 작다고 했다. 결국 김성근은 재계약 문제로 구단과 갈등을 빚으면서, 한참 후배인 이만수에 밀리는 모양새로 팀을 떠나야 했다. 김성근은 "내가 SK를 떠나면서 달라진 것은 인천에서 서울로 이사간 것 밖에 없다"고 했다.


SK시절 김성근 감독. 스포츠조선DB
조광래와 김성근은 외로웠다. 때로는 한국축구와 한국야구의 중심에 있기도 했지만 외톨이였다.

2000년 프로축구 K-리그 FC서울을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끈 조광래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야인이었다. 서울에서 경질된 후 불러주는 데가 없어 축구판 외곽을 맴돌았다. 그래도 한국축구가 흔들릴 때마다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일시적인 공백이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2008년 배고픈 시민구단 경남FC 지휘봉을 잡은 조광래는 윤빛가람 이용래 김동찬 등 무명에 가까웠던 선수들을 국가대표급 선수로 키워냈다. K-리그의 비주류 경남을 빅클럽들이 겁내는 팀, 6강을 넘보는 팀으로 변화시켰다. 조광래는 "어린 선수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너무 재밌다"고 했다.

서울 사령탑 때 중학생 이청용(잉글랜드 볼턴)의 재능을 알아보고 발굴한 조광래다. 한국축구계에서 어린 선수를 발굴해 최고의 선수로 키워내는 능력은 조광래가 최고라는 데 물음표를 다는 이들은 별로 없다. 2년 반 동안 경남에서 이룬 성과는 조광래를 A대표팀 감독으로 이끌었다.


사실 감독 취임 때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조광래에게는 늘 축구협회와 대척점에 있는 '야권인사'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이런 핸디캡을 실력으로 당당히 이겨낸 것이다.

2002년 LG 트윈스를 준우승으로 이끈 김성근도 그해 LG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김성근은 선수들을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했다. 때로는 프런트의 안일함을 질타했고, 비효율성을 비판했다. 팀 전력 강화를 위해 좀 더 많은 지원을 바랐다.

이로 인해 김성근에게는 선수 육성 능력이 탁월하고 좋은 성적을 내지만 끊임없이 불평을 토해내는 고집불통이라는 이미지가 씌워졌다. 김성근은 한동안 기피인물이었다. 그런데 김성근의 진가를 아는 이들은 달랐다. LG에서 경질된 2002년 말 김성근 아래에서 꽃을 피운 선수들이 모여 스승을 위해 환갑잔치까지 열어줬다.

김 감독은 야구를 위해 태어난, '야구 마스터'였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야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뛰어갔다. 야인 시절 고등학교, 대학교 야구부를 찾아가 지도했다. 2005년 김성근이 이승엽이 뛰던 일본프로야구 지바 롯데에 합류했을 때 신분은 순회코치였다. 경기가 시작되면 김성근은 덕아웃에 들어가지 못하고 관중석에서 게임을 지켜봐야 했다. 젊은 선수들의 타격을 지도하던 김성근은 이듬해 정식 코치로 승격됐다. 팀 타격이 좋아지자 일본인들도 그를 인정한 것이다.김성근은 그때를 떠올리며 "야구는 어디를 가나 똑같다. 나는 야구와 함께할 때 가장 기쁘다"고 했다.

조광래는 항상 한 발 앞서갔고, 김성근은 철저했다. 조광래는 힘과 근성을 강조하는 한국축구에 세밀한 패스와 빠른 템포, 영리한 축구를 심고자 했다. 당장의 성적도 중요하지만 좀 더 앞을 내다보고 싶어 했다. 한국축구가 세계무대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려면 근성, 힘이 아닌 머리를 쓰는 축구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런 구상을 대표팀에 불어넣고자 했다. 어린 선수들을 뽑아 테스트를 하고 지도했다. 선수들이 버거워할 만큼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한때 찬사가 쏟아졌다. 지난 6월 유럽의 강호 세르비아전(2대1 승), 아프리카축구의 맹주 가나전(2대1 승)에서 조광래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역동적인 움직임과 빠른 공수전환, 정교한 패싱게임을 선보였다.

물론 비판도 많았다. 지나치게 해외파 위주로 대표팀을 운영하고, 젊은 선수에 집착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광래는 자신의 소신을 바꾸지 않았다. 축구인 모두 방법론에서는 이론이 있었지만 그가 제시한 방향을 옳다고 했다. 그러나 기다려주지는 않았다.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한 조광래와 김성근은 이제 야인이다. 그러나 한국축구와 한국야구가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 같다. 선수 육성에 일가견이 있는 조광래는 한국축구의 자산이다. 그를 방치하는 것은 한국축구의 손실이다.

조광래의 경질 소식을 전해 듣은 김성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한 번 보고싶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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