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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 20분이었다.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여론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17일(이하 한국시각) 호주와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결승골을 폭발시켰지만, 슬라이딩을 하다 스쳐서 우연히 들어갔다는 말이 많았다. 무엇보다 장신인 이정협의 헤딩 능력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었다. 타깃형 공격수로서 제공권 장악은 필수였다. 그러나 좀처럼 공을 머리에 맞추지 못했다.
26일 시드니의 호주스타디움에서 열린 호주 아시안컵 이라크와의 4강전에 이정협은 또다시 선발로 나섰다.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울리 슈틸리케 A대표팀 감독은 25일 공식 기자회견에서 "많이 뛰면서 이라크를 괴롭혀야 한다"고 했다. 하루를 덜 쉰 이라크의 체력적인 면을 교묘하게 공략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그래서 기동력이 좋고, 패스가 원활하게 연결되는 조영철(26·카타르SC)을 투입할 것이라 예상했다.
슈틸리케 감독의 '한 수'가 또 한 번 적중했다. 이정협은 전반 20분 선제골에 이어 후반 5분에는 김영권의 추가골도 도왔다. 아크 서클에서 내려오던 공중볼을 가슴으로 내주자 김영권이 논스톱 왼발 슛으로 골네트를 갈랐다. 이날 두 골이 모두 이정협의 머리와 가슴에서 나왔다.
'빅매치 킬러'임을 입증한 이정협은 이날 경기장을 찾은 한국 교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관중들은 후반 44분 이정협을 목놓아 외쳤다. 관중들의 연호에 힘이 났는지 후반 추가시간에도 지칠 줄 몰랐다. 계속해서 전방 압박을 실시했다. 주심의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이정협은 그라운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허무해하는 상대 수비수들을 위로하기까지 했다. 이정협의 활약에 한국은 1988년 이후 27년만에 아시안컵 결승에 안착했다.
불과 2개월 전까지만 해도 태극마크는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희망사항이었다. 이정협은 2014년 K리그 클래식에서 4골(25경기)에 그친 '무명'이다. 상주에서도 선발 출전이 2경기에 그쳤다. 철저히 '백업'이었다.
그런 그가 호주아시안컵 결승진출의 일등공신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인생 역전이다. 그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지난해 12월에 운명처럼 시작됐다. 슈틸리케 감독이 제주 전지훈련에 그를 깜짝 발탁했다. 1m86의 장신에도 활동량과 스피드가 좋은 모습을 눈여겨 봤다. 5경기나 지켜보고 결단을 내렸다. 미래를 위한 선발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반전이 있었다. 그는 제주 전지훈련을 마무리하는 자체 평가전에서 득점에 성공했다. 마침내 최종엔트리까지 발탁돼 '슈틸리케의 신데렐라'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최종 리허설에서 득점포를 가동하더니, 본선에서도 2골을 뽑아내며 진정한 슈틸리케호의 주전 공격수로 자리잡았다.
마침내 꿈도 이뤄졌다. 6개월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그는 '월드컵 스타'인 이근호(30·엘 자이시)를 보며 국가대표가 되는 날을 상상했다. 군인 신분으로 브라질월드컵에 출전해 1골-1도움을 기록한 이근호가 그의 롤모델이었다. 월드컵이 끝난 이후 이정협은 경북 문경 국군체육부대 내 웨이트트레이닝장에서 이근호로부터 따뜻한 조언을 들었다. "열심히 하면 국가대표가 될 수 있다. 함께 대표팀에서 뛰어 보자." 하늘 같은 병장의 말에 이정협은 "그런 날이 오겠습니까"라며 웃어 넘겼다. 6개월만에 현실이 됐다. 그는 태극마크를 가슴에 품고 이근호와 함께 한국의 아시안컵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수만 관중 앞에서 선보인 '거수 경례 세리머니',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흘렀다.
14만 9000원의 '병장 월급'으로 수십억원의 연봉을 받는 러시아 선수들을 돌려 세웠던 '롤모델' 이근호처럼, 15만 4800원(2015년부터 13만 4600원에서 인상)의 상병 월급을 받는 이정협이 이번에는 이라크를 혼쭐냈다.
모두가 '안된다'라고 했다. 그러나 슈틸리케 감독은 역발상을 했다. 이정협은 아직 무르익진 않았다. 그러나 부상으로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 못한 한국을 대표하는 타깃형 스트라이커 이동국(36·전북)과 김신욱(27·울산)의 빈 자리는 느껴지지 않았다.
시드니(?)=김진회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