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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차례에 걸친 석주관 전투에서는 구례 현민 3천500여명과 화엄사 승병 153명이 전사했다.
임진왜란 때부터 구례를 지켜온 현감 이원춘이 1597년 8월 16일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자 왕득인이 의병 400여명을 일으켰다.
왕득인은 구례와 경남 하동 사이의 요새지인 석주관산성에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교전을 벌였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1597년 9월 말 두 번째 전투에서 패해 모두 전사했다.
이후 아들 왕의성이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등과 함께 석주관에서 항전했다.
왕의성과 의사들은 인근 화엄사에까지 구원을 요청해 승군 153명과 곡식 103섬을 지원받았다.
이들은 1597년 11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3차례에 걸쳐 왜의 공격을 막았으나 마지막 전투에서 패해 전사했고 훗날 이들의 정신을 기리는 석주관 칠의사묘와 정려가 세워졌다.
당시 5만7천여명의 왜군이 호남을 공격한 것을 두고 저자들은 "정유재란은 오로지 호남을 짓밟기 위한 전쟁"이라며 "석주관전투는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전 현민이 항거한 보기 드문 역사"라고 평가했다.
왜의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앞서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왕을 잡고 명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부산에서 한성, 평양으로 북진하느라고 호남을 놓쳤다고 판단해 정유재란에서는 호남을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다시 쓰는 구례 석주관전투'는 구례를 포함한 호남 의병장들의 전투도 함께 서술했다.
고경명 부자의 금산 전투, 황진의 웅치·이치전투, 김시민의 1차 진주성 전투, 황진의 2차 진주성 전투, 이복남과 이원춘의 남원성 전투 등을 기록했다.
공동 저자인 정동묵 작가는 "우리는 흔히 역사를 과거로만 기억하지만, 과거의 역사는 현재로도 이어진다"며 "일제강점기를 미화하는 친일 매국자들과 현재의 독자들에게 불의에 항거한 구례 의병들의 숭고한 뜻이 전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areum@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