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인터뷰 종합]"발가벗겨진 기분"…'사라진시간' 정진영, 33년차 관록의 배우가 메가폰을 든 이유

이승미 기자

기사입력 2020-06-11 13:39


[스포츠조선 이승미 기자]"배우 인생 33년만에 용기낸 첫 연출작, 소재의 관습도, 이야기의 전형성도 모두 탈피하고 싶었습니다."

의문의 화재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형구(조진웅)가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사라진 시간'(정진영 감독, ㈜비에이엔터테인먼트·㈜다니필름 제작). 영화의 연출과 갱을 맡은 정진영이 1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진행된 라운드 인터뷰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황산벌' '왕의 남자' '7번방의 선물', '국제시장', '택시운전사' 등 상업영화와 '클레어의 카메라'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예술·독립영화, '보좌관', '화려한 유혹' 등 드라마, 시사 교양 프로그램 진행까지 33년 동안 전방위적 활약을 펼쳐온 관록의 연기파 배우 정진영. 영화계에 몸담으며 오랜 시간 연출의 꿈을 품어왔던 그가 직접 갱까지 쓰며 심혈을 기울이며 준비한 영화 '사라진 시간'으로 첫 연출 도전에 나섰다.

'사라진 시간'은 하루아침에 나에 대한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신선한 설정과 예측할 수 없는 기묘한 스토리로 러닝타임 내내 관객을 미스터리 속으로 끌어당긴다. 미스터리의 중심에 놓인 형구라는 인물을 통해 타인이 규정하는 삶과 자신이 바라보는 사람, 그 간극에 놓인 사람의 고독과 외로움을 신선하게 그려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가 끝난 후에도 깊은 사색에 빠지게 만든다.
이날 정진영 감독은 인터뷰 시작과 함께 첫 연출작 개봉을 앞둔 떨리는 소감을 전했다. "개봉을 앞둔 기분이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고 입을 연 정 감독은 "연출자로서 후반 작업은 작년 가을에 끝냈다. 개봉을 앞두고도 담담할 줄 알았다. 이준익 감독님이 '지금은 그럴 거 같아도 개봉 앞두면 미칠걸?' 이라고 하셨었는데, 나는 그러지 않을 줄 알았다. 이준익 감독님은 작품을 몇 편이나 만드신 거장인데도 아직도 개봉 전에는 너무 떨리다고 하셔서 그냥 유난하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연출자로서 개봉을 앞두니까 발가벗겨지는 느낌마저 든다"고 말했다.

이어 "배우로서 출연작의 개봉을 앞두면 평가를 앞둔 기분이지만, 그건 캐릭터와 연기에 한정된 평가다. 이번 영화는 내가 연출에 시나리오까지 쓴 것이기 때문에 나의 전체를 평가받는 기분이다"며 "이 영화는 내가 빼어난 연출력을 가져서 시작한 게 아니라 나의 진심을 투박하게 다가가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거다. 정말 연출은 또 다른 영역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첫 연출작을 기묘하고 다소 어려운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낸 이유에 대해 묻자 "어렵다기 보다도 논리적인 해석과 다른 경로로 와 닿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사실 그 안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쉽다. 오히려 관객들이 막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이길 바랐다"고 답했다. "제가 이 영화로 말하고 싶은 화두 같은 것들이 다소 관념적일 수는 있다. '나는 누구 인가'라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선문답으로 보일 수도 있다"며 "하지만 모두에게 '내가 규정하는 나'와 '남이 바라보는 나'가 존재하고, 또 우리 모두 그런 걸로 고민하고 또 '진짜 나'가 아닌 '남들이 생각하는 나'로 맞춰 살고 있진 않은지 걱정하지 않나. 나는 영화를 통해 '정말 나는 무엇일까'에 대한 이야기로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데뷔 33년 만에 연출을 도전하게 된 이유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영화 연출이 꿈이었지만 긴 시간 배우로 살았고, 연출할 능력이 안 된다고 스스로 평가했기에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다 4년 전부터 용기를 냈다. '내가 영화를 만들었다가 망신당하면 어쩌나'라는 겁도 있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결과가 어찌되었든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장률 감독님이나 홍상수 감독님의 독립 영화 출연을 많이 해왔다. 그런 작품에 출연하면서 영화라는 게 꼭 거대 자본이 아니라 적은 자본으로도 정성과 진심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며 "첫 연출을 하면서 힘들지만 행복했다. 며칠 끙끙 대며 글을 쓰다가 풀리는 순간 쾌감이 있었고 촬영하는 순간도 어려웠지만 행복했다. 후반 작업도 하나하나 지켜보면서 배우면서 하는 과정이 행복했다. 하지만 개봉을 앞두니까 굉장히 느낌이 다르다"고 말했다.

연출에 도전할 수 있도록 자극을 준 영화인이 있냐는 질문에 정진영은 의외로 '김창완 선배'라는 답을 내놔 눈길을 끌었다. "물론 많은 감독님과 배우들을 존경하는데, 제가 연출의 꿈을 스물스물 갖게 된 게 '화려한 유혹'이라는 드라마 이후부터다. 그때 김창완 선배와 연기를 했는데, 김창완 선배님이 내게 자극을 주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는 그 선배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쭤보니 대학교 때 기타를 배우셨고 그때부터 하신 거라고 하더라. 본인은 비틀즈도 안 들어봤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음악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 굉장히 놀랐다. 저런 훌륭한 아티스트가 대학교 때부터 음악을 시작해도 저렇게 할 수 있구나 싶었다"며 "그동안 연출에 도전하지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내가 체계적인 연출 학습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창동 감독님의 '초록물고기'(1997)에서 연출부 막내로 참여하긴 했지만, 사실 막내가 무엇을 해봤겠나. 그런데 김창완 선배님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거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용기를 낼 수 있던 계기다"고 설명했다.
영화를 만들 때 작법이나 스토리텔링 면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이 있냐는 질문에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를 좋아한다. 뭔가 논리를 뛰어넘는 기운을 좋아한다. 하지만 뭔가 영향을 받은 작품이 있진 않다. 이 영화는 논리적으로 펼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운을 이어받아서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영화다. 어떤 누구의 스타일을 따라가려고 했던 건 아니다"고 답했다. " '사라진 시간' 이전에 썼던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쓰면서도 스스로 놀랐다. 스스로 소재를 관습적이고 익숙하게 펼쳐나가고 있더라. '내가 왜 이렇게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더라"며 "그래서 결국 그 시나리오를 버렸다. 새 시나리오를 쓰면서는 어디에도 사로잡히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흉내 내지 말고 마음 내키는 대로 가보자 했다. 기존의 시나리오 작법이나 익숙한 것으로 달려가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것으로 가보자 했고 그로 인한 결과가 '사라진 시간'이다"고 말했다.


시나리오 작업 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 아무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정 감독은 "이준익 감독님이 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걸 아셨지만 보여드리지는 않았다. 감독님의 의견이 들어가면 안 될거라 생각했다"며 "물론 불안한 것도 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뚝심 있게 가고자 했다. 처음으로 보여준 사람이 바로 주연배우 조진웅 씨였다. 초고를 쓰지 마자 보여줬는데 하루 만에 출연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시나리오가 어렵지 않냐고 물으니 '뭐가 어렵냐. 딱 내 이야기인데'라고 하더라"며 "한다고 결정해준 것도 고마웠는데, 내 이야기를 믿어준다는 것이 정말 고마웠다. 그제서야 이준익 감독님께 시나리오를 보여드렸다. 조진웅이라는 배우를 캐스팅 하고 나니까 어깨가 으쓱해지더라. 감독님이 보신 후 좋은 시나리오이지만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평가가 엇갈릴 테니까 그건 감당해야 된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선배 배우의 작품이기에 후배에게 출연을 강요할 수 없었다는 정 감독은 "'너 내가 하라고 해서 한 거 아니냐'고 물었을 때도 '내가 미쳤습니까. 그런거 따지면 제가 출연해야 할 작품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라고 하더라. 처음에는 진웅씨가 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시나리오를 주지 말까라고도 생각했다"며 "하지만 주인공 형구가 조진웅 씨를 모델로 쓴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주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일단 시나리오를 줬다. 그러고 하루 만에 하겠다고 하니까 용기를 얻었다. 정말 고맙다"고 덧붙였다.
조진웅을 기반으로 캐릭터를 쓰고 또 그를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묻자 "저는 조진웅 씨의 안에 여리여리한 느낌을 알고 있다. 형사 설정이라고 해서 형사의 터프함을 원한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맞이할 때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저는 진웅이에게 그런 여린 모습을 봤다"고 덧붙였다.

연출 경험이 앞으로의 연기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정진영은 "아무리 연기를 해도 아무리 좋은 배우랑 연기를 하도 배우는 자기 연기만 보게 된다. 그런데 모니터에서 떨어져서 배우들의 연기과정을 A부터 Z까지 보게 된 거다. 우리 배우들의 훌륭한 과정을 봤으니 큰 공부를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실 저는 배우 할 때 감독 말을 굉장히 잘 듣는 배우다. 그래서 감독님들이 저를 좋아한다. 결국 배우는 그 캐릭터에 대해 100을 알고 있다고 하면 감독은 그 캐릭터에 대해서는 10을 알거다. 하지만 그 작품에 대해서는 감독이 100을 알고 배우는 10을 한다. 그래서 감독이 내 작품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걸 파악할 수 있는 거다. 그래서 저는 감독님을 철저하게 믿는 편이다"며 자신의 연기 스타일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어서 첫 연출작에 직접 출연을 할 생각은 없었냐고 묻자 그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며 웃었다. "초보 연출자가 만들어나가는 것도 급한데 출연까지 하면 이도저도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제가 '초록물고기'에서 연출부 막내를 하면서 연기를 했는데, 굉장히 후회했다. 하나 하기도 벅차더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정 감독은 자신에게 있어 연출은 "가보고 싶었던 곳. 꼭 가야만 했던 곳"이라고 정의했다. "사실 안 갔다 와도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지 않나. 나에게 연출은 가고 싶었고 꼭 다녀와야만 했던 곳이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갔다 왔으니 만족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평생 후회했을 것 같다"

한편, 정진영 감독이 메가폰을 '사라진 시간'에는 조진웅, 배수빈, 정해균, 신동미, 이선빈 등이 출연한다. 오는 18일 개봉.

이승미 기자 smlee0326@sportschosun.com 사진 제공=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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