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WHO, 게임 과몰입을 질병으로. 원인과 향후 대책은?

남정석 기자

기사입력 2019-05-26 17:35


WHO가 '게임이용장애'를 ICD-11에 질병코드로 등록하겠다며 소개한 이미지. 출처=WHO

엔씨소프트와 네오위즈 등 게임회사들은 '게임은 문화입니다' '질병이 아닙니다' 등의 문구를 새긴 이미지를 SNS에 올리며 WHO의 결정에 반발하고 있다. 출처=엔씨소프트

결국 우려했던대로 게임 과몰입에 대한 세계보건기구(WHO)의 질병코드 등재가 확정됐다.

WHO는 26일(이하 한국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72차 WHO 총회에서 '게임이용장애'(Gaming disorder), 즉 게임 과몰입을 질병으로 분류한 ICD-11(11차 국제질병표준분류 기준안)을 통과시켰다. 28일 총회 폐막회의에서 보고 절차만 남겼을 뿐 개정 논의는 이미 끝난 셈이다.

게임 과몰입이 정신적인 질병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이미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 문제였다. 이를 게임산업계와 의학계의 이권 다툼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게임 과몰입에 대한 사회적 현상을 원인 혹은 결과로 봐야 하는지를 여전히 다투고 있는 상황에서 의학계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결과로 인해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나 합의점 없이 갈등만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산업계에 미치는 유무형의 타격 역시 상당히 심각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게임이 과연 질병인가

WHO가 28년만에 개정하는 ICD-11에 게임 과몰입 및 장애를 질환으로 등재할 것이란 소식이 지난 2017년 12월 처음 알려지면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졌지만, 근원은 '인터넷 중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96년 미국 피츠버그대의 킴벌리 영 박사가 인터넷 채팅에 빠진 주부의 사례를 미국 정신의학회에 보고하면서 처음 언급된 바 있다. 알코올 중독 진단 기준을 그대로 인터넷에 대입한 방식인 일종의 '영의 척도'는 이후 게임 중독까지 다루는 많은 연구에도 그대로 쓰였지만 정확한 증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며 정신과에서도 정식 장애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2013년에 미국 정신의학협회(APA)에서 '인터넷 게임 장애'라는 용어를 발표하고 일정 증상을 보이면 이를 장애로 판단한다고 정의했지만, 이를 정식으로 인정받기에 아직 과학적 연구나 근거가 부족하다며 질병코드 부여를 보류하기도 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게임을 알코올, 도박, 마약과 함께 4대 중독물질로 규정하려는 당시 신의진 새누리당 의원의 법안이 발의되면서 큰 파장이 일었다. 끝내 통과가 되지는 못했지만, 셧다운제와 더불어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는 일종의 '낙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번 ICD-11은 2022년부터 효력을 발휘하는데, 게임 유저가 스스로 게임 통제능력을 잃고 일상 생활보다 게임을 중요하게 여기는 증상을 게임이용장애로 규정했다. 12개월 이상 증상이 지속될 경우란 단서가 달렸지만, 심각할 경우 이보다 적은 기간도 질병으로 판정할 수 있다는 조항으로 인해 얼마든 자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도 있다.

WHO의 권고에 불과하지만 국내에서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국제기구의 결정인데다, 의학계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보건복지부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에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를 등재하겠다는 기본 입장을 밝히고 있다. 다만 통계청은 KCD 개정이 현재 ICD-10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 빨라야 2025년에 개정이 될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일단 5년 이상의 시간은 확보한 셈이지만, 이를 둘러싼 상당한 사회적 갈등은 불가피한 상태다.


게임계 큰 타격, 자성의 계기라는 목소리도

이미 국내외 게임업계는 WHO의 계획을 지난해부터 강력하게 반발해 오고 있다.

지난해에는 한국게임산업협회가 미국, 캐나다, 호주, 유럽 등 18개국의 게임산업협회 등과 더불어 WHO의 계획에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공식 성명을 냈으며, 최근에는 협회와 한국게임학회 등 88개 단체로 구성된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오는 29일 공식 출범하며 반대 운동을 강력하게 진행해 나갈 예정이다. 공대위는 "질병코드 지정은 문화 예술적 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아동의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다. 또 충분한 연구와 과학적 근거가 확보되지 않고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내린 성급한 판단"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게임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지난달 WHO에 전달한 반대 의견서를 통해 "청소년들의 게임 과몰입은 게임 그 자체가 요인이 아니라 부모의 양육 태도와 학업 스트레스 등 사회심리적적 요인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며 게임이용자 패널 조사 결과를 포함시키기도 했다. 이에 앞서 미국 게임산업협회는 지난 40년 이상 전세계에서 20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게임을 즐겨왔고, 게임에 중독성이 있다는 연구와 마찬가지로 없다는 과학적 연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신 질환으로 분류하는 것에 정면 반박했다. 미국 존스홉킨대와 영국 옥스포드대 등 정신건강 분야 연구자 36명도 지난해 임상심리학 저널에 투고한 논문을 통해 '명확하고 과학적 기준이 없고 근거들이 빈약하다, 이를 지지하는 연구진도 게임 장애를 명확히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등의 근거를 지적하며 WHO를 비판했다.

만약 질병코드가 등재될 경우 산업계에 미칠 영향은 심각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서울대 산학협력단의 자료를 근거로 2022년부터 질병코드가 등재될 것으로 가정할 경우 2023년부터 2025년까지 3년간 게임산업의 규모가 10조원 이상 위축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로 인해 고용 규모도 8700여명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치료 및 예방사업을 명목으로 부담금을 내야하는 일종의 '중독세'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게임=질병'이라는 인식 확산은 돈으로 환산하기 힘든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줄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들은 "그동안 셧다운제와 같은 규제나 중독물질 규정 등의 시도가 게임사들의 매출 하락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대신 이번 질병코드 등재는 게임에 덧씌워지고 있는 '사회악'이라는 굴레를 심화시켜 현재의 산업계에 미치는 타격뿐 아니라 미래의 창의적인 인재들이 게임산업계를 기피하면서 결국 생태계가 무너지는 악순환을 야기할 수 있다. 벌써부터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라고 토로했다.

심리학 박사인 이장주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 소장은 "과도하게 몰입을 하는 것은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알코올, 약물, 도박 중독 등의 증상을 그대로 게임 과몰입에 적용시켜 질병화 시키는 것은 객관적, 합리적 근거도 없을뿐 아니라 사회적 논의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말도 되지 않는 시도"라면서 "이런 사회문화적 이슈를 공동체 내에서 합리적으로 풀어야 하는데, 이를 병으로 규정하고 약물로 치료해야 한다면 대표적인 '과잉의료'라 할 수 있다. 또 대부분의 정상적 게임 이용자도 잠재적인 환자로 만들 수 있는 등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동반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게임계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문화부와 함께 정부의 게임산업 육성정책을 이끌었던 김동현 가상현실콘텐츠협회 회장은 "한국 게임사들의 주 수입원인 MMORPG는 분명 몰입도가 크다. 현실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콘텐츠를 구성하거나, 지나치게 몰입감 높은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면서 사회적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며 "몰입감이 적은 다른 게임들과 명확한 선을 그어줘야 선의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수익 극대화를 이제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가 진정한 놀이문화로서의 게임 콘텐츠를 만든다는 사회적 책임을 다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했다.
남정석 기자 bluesky@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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