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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송시열의 북벌은 과연 진심이었나

김영록 기자

기사입력 2018-07-05 16:52



[스포츠조선 김영록 기자]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던 시기,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 이상 이름이 거론되고, 4명의 임금을 모셨던 강직한 유학자. 바로 송시열이다.

-송시열, 그는 누구인가?

서인의 우두머리로 남인과의 권력 다툼 속에 희생되었던 송시열. '죄인의 우두머리'라는 애매한 죄명으로 사형을 집행한 것은 조선시대에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송시열은 굳세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기력이 뛰어나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였다.

(중략) 그는 큰 뜻을 내세웠으나 재주가 없었고 기질이 거칠며 학문이 허술하여 함양의 덕이 부족했다."

-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15년 6월

같은 서인들 사이에서도 상반된 평가가 쏟아졌던 송시열. 사후 영의정으로까지 추증되었던 그가, 종2품 이상 정무직 벼슬을 한 건 고작 10개월이라는데? 왕이 임명하면 사양하고, 사양을 거부하면 관직을 받았다가 사직소를 내고 도로 낙향했던 '관직 밀당남' 송시열!

관직은 하지 않으면서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한 산림(山林), 그들이 누구인지 송시열을 통해 알아보자.


-효종의 정치 파트너, 송시열

적장자 소현세자의 죽음. 그 대신 왕위에 오른 효종. 적통이 아니라는 콤플렉스는 그를 압박했고,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신하로 불러들인다.

"무비(武備)를 닦아 외모(外侮, 오랑캐)를 막으소서."

- 효종실록, 효종 즉위년 6월

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효종. 그에게 송시열은 기축봉사를 올린다. 당시 조선의 13가지 당면 과제를 담은 비밀 상소로, 북벌 군주 효종과 뜻을 함께 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러나 든든한 정치적 파트너가 된 두 사람에게 시련이 닥쳤다. 급작스러운 효종의 죽음, 뒤이어 격렬하게 펼쳐지는 예송논쟁! 북벌의 꿈, 이렇게 무너지는 것일까?

송시열은 사대주의자가 아니다?

기해년 효종과의 독대로 파격적 행보를 보였던 송시열. 기록에 따르면 송시열과 효종은 북벌에 대한 생각이 다소 달랐다. 두 사람의 입장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사실 송시열의 북벌론과 예론에 대한 입장은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된다. 바로 주자학! 남송의 주자를 본받았던 원칙주의자 송시열, 그는 과연 사대주의자였나? 송시열의 새로운 얼굴 '조선중화주의'는 무엇인가? 조선중화주의로 설명되는 그의 행적을 좇는다.

네 명의 임금을 모셨던 조선 유교의 거성 송시열의 속내는 7월 8일 일요일 밤 9시 40분 KBS 1 TV <역사저널 그날> '송시열의 북벌은 과연 진심이었나?'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lunarfly@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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