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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며 고유가 정책으로 '지상 낙원'을 건설했던 국가가 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무상 교육, 무상 의료, 저가 주택, 토지 재분배 등 복지 정책을 펼쳤던 남미 국가 베네수엘라다.
그러나 남미에서 최고 부유 국으로 손꼽혔던 베네수엘라는 우고 차베스 대통령 타계 이후 경제 상황이 파국으로 치달았다. 평균 물가 상승률은 2014년 141%, 2015년 180%에 이어 2016년에는 700%를 기록했다. 살인적인 물가 상승과 더불어 베네수엘라 화폐인 볼리바르 통화 가치는 99% 폭락하면서 경제 체제 자체가 무너져 버렸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 뒤를 이어 취임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심각한 식량난과 경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최저 임금 인상안을 여러 번 내놓았다. 이에 따라 베네수엘라 국민은 식품 보조금을 포함해 매달 최소 25만 볼리바르(약 35,000 원)를 벌 수 있게 됐지만, 연간 물가 상승률 700%에는 턱없는 수치였다.
이렇게 생활고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 국민 중 일부는 최근 온라인 게임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이들은 1999년부터 서비스 중인 MMORPG '룬스케이프'에서 게임 내 재화인 골드를 벌어 이를 비트코인 같은 가상 화폐로 전환하거나 유저 간 거래를 통해 현금으로 바꿔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룬스케이프'에서 베네수엘라 유저들은 '독의 불모지(Poison Waste)' 지역에 등장하는 뱀 보스 '줄라(Zulrah)'를 사냥해 골드를 벌었다. '줄라'는 '줄라의 비늘'을 확정적으로 주는 몬스터였고 '드래곤 할버드', '드레곤 투구' 등 특수 장비와 다양한 재료 아이템도 획득할 수 있었다. 베네수엘라 유저들이 '줄라' 사냥을 통해 얻은 아이템을 팔아 현금으로 환전하면 시간당 2~3 달러(약 2,200~3,400 원)를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5월 25일 진행된 패치로 '줄라'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 30% 수준으로 감소하면서 베네수엘라 유저들이 하루에 버는 돈도 줄어들게 됐다. 이에 따라 베네수엘라 유저들은 새로운 골드 벌이 방법을 찾게 됐는데,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룬스케이프' 유저 몇몇은 게임 커뮤니티에서 효율적으로 골드를 버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효율이 좋은 방법은 PvP 지역인 '황무지(Wilderness)' 곳곳에 등장하는 '녹색 용(Green Dragon)'을 잡아 100% 확률로 얻을 수 있는 '용의 뼈(Dragon bones)', '녹색 용 가죽(Green dragonhide)' 등 재료 아이템을 파는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베네수엘라 유저들은 시간당 0.5 달러(약 560 원)를 벌 수 있었다.
베네수엘라 유저들은 판타지 세계관 게임에 등장하는 용 사냥꾼, '드래곤 슬레이어'처럼 '룬스케이프'에서 뱀 보스 몬스터인 '줄라'에 이어 '녹색 용'을 모조리 잡고 있다. 그러나 '드래곤 슬레이어' 베네수엘라 유저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처치하기 위해 '황무지'를 찾는 유저도 함께 늘어나고 있다.
'드래곤 슬레이어' 베네수엘라 유저들을 적대시하는 유저들은 게임 커뮤니티를 통해 "베네수엘라 유저들은 '룬스케이프'에서 골드를 벌기 위한 작업장을 만들었고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라며 "게임 속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이들을 끝까지 처단하겠다"라고 강경한 입장을 전했다.
이와 반대로 베네수엘라 유저들에게 '녹색 용' 사냥법이나 다른 효율적인 골드 수급 방법을 알려준 유저들은 게임 커뮤니티에서 "경제가 완전히 무너진 베네수엘라에 살면서 게임 속에서라도 살 길을 찾으려 하는 베네수엘라 유저들을 응원한다"라며 "베네수엘라 유저들이 게임 내에서 버는 돈은 우리가 버는 돈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이므로 이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마음대로 처치하는 유저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지난 8월 미국 경제 전문지 포천(Fortune) 보도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화폐인 볼리바르는 블리자드 MMORPG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 이하 WoW)' 게임 내 화폐인 골드보다 가치가 떨어진다. 볼리바르는 공식 거래보다 비교적 환율이 좋은 암시장에서 8,493 볼리바르 당 1 달러 수준인데, 'WoW' 북미 서버 기준 골드는 8,385 골드가 1 달러 수준이다.
베네수엘라는 이처럼 실제 화폐 가치가 게임 내 화폐보다 낮은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베네수엘라 유저들은 좀 더 안정적인 화폐를 찾게 됐고, 비트코인 같은 가상 화폐와 함께 지난 몇 년 동안 100만 골드 당 1 달러 수준 환율을 유지해 온 '룬스케이프' 골드에 눈독 들이게 됐다.
한 업계 관계자는 "베네수엘라는 한 달 최저 임금이 35,000 원 수준인데 '룬스케이프'를 하루 8시간 플레이하면 불과 8일 만에 35,000 원 정도를 벌 수 있다"며 "이 때문에 '룬스케이프'로 생계를 이어가려는 베네수엘라 유저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이들을 적대하거나 혹은 도와주자는 입장으로 나눠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림 텐더 / 글 박해수 겜툰기자(gamtoon@gamto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