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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화약인지, 돌멩이인지 저도 몰랐습니다. 다만 어르신을 속이기 위해 저 자신도 속인 것입니다. 저 또한 두려워 해야 했으니까요"라며 긴 숨을 토해내는 유아인. 이 남자의 박력사용설명서에 시청자는 또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홍인방은 이번 해동갑족의 역모에는 이성계가 배후로 있었고 그를 탄핵해달라는 내용이 담긴 상소를 민제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너희에게 협박하러 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느냐? 내 앞에 무릎을 꿇으란 말이다. 난 너의 힘을 알지만 너희는 싸워본 적이 없으니 너희의 힘을 모른다. 사람들이 가진 믿음일 뿐, 나처럼 믿지 않는 이에게는 소용이 없다. 연명서가 없다면 너희 해동갑족 700년 역사는 끝난다. 내가 원하면 못 할게 없다"고 악을 썼다. 그 누구도 건들지 못했던 해동갑족이나 홍인방은 겁내지 않았다.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불같이 몰아세웠고 이에 민제는 흔들렸다.
홍인방의 섬뜩한 겁박에 해동갑족 가문을 한 자리에 모은 민제. 예상대로 해동갑족은 눈덩이처럼 커진 홍인방의 세력을 부담스러워했고 가문의 미래를 위해 이번 역시 홍인방의 편에 서자며 몸을 사렸다.
뭔가 숨기는 모양새를 취하는 이방원을 향해 "너는 스스로 확신이 설 때 다른 이와 소통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엔 나도 너와 생각이 같다. 파도는 더 큰 파도에 꺾이는 법이다"고 선구안을 보였다. 스승의 지지를 등에 업은 '불통(不通)' 이방원은 화약이 든 통과 돌이 든 통을 준비, 분이(신세경)에게 이 중 하나의 상자를 자신에게 가져달라고 부탁했다. 분이가 건네준 하나의 상자를 품에 안고 그 길로 민제와 해동갑족의 회합장소를 급습했다.
이방원은 해동갑족 앞에 화약 상자를 놔두고 홍인방이 했던 대로 이들을 겁박했다. 그는 ""우리 가문은 모반의 죄를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며 해동갑족 가문은 불의와 부정에 이름 하나 추가하고 아무 일 없이 그동안 누렸던 것을 누리며 흘러갈 것이다"며 말문을 열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온 나라가 불타고 백성들이 도륙되던 때 여러분의 가문은 연일 강화도 계곡에 틀어박혀 시화전(시와 그림을 전시하는 전람회)을 읊었다지요. 고려의 참담한 난세를 시로서 통탄했지요. 그런데 대체 그것 말고 700년 동안 뭘 하셨습니까? 당신들은 자그마치 700년 동안 역사를 방관해왔소.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소. 그게 해동갑족이야!"
꾹꾹 눌러 담은 통한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비단 자신의 가문을 살리기 위함이 아닌 지옥 같은 난세를 탈출하고자 했던 한 소년의 외침이었다. 홍인방의 힘에 굴복하는 해동갑족의 모습이 썩어빠진 고려를 만든 권문세족 그 자체였고 이런 난세를 잘라내 버리고 싶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어린 이방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뛰어난 정치가, 존엄한 군왕의 모습만이 이방원에게 남아있었다.
이방원은 흔들리는 해동갑족을 향해 "해동갑족의 미래는 홍인방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여러분을 겁박하고 무릎 꿇릴 것이다. 그때마다 당신들은 굴복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도 져 주자. 똥이 무서워서 피하겠나'라면서. 오늘 밤처럼 무기력하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것이 지난 700년과 다를 바 없는 앞으로의 700년 역사가 될 것이다"며 일침을 던졌다. 이방원은 홍인방과 길태미(박혁권), 그리고 이들의 배후인 이인겸(최종원)의 탄핵이 적힌 상소를 건네며 "우리와 함께 도당 3인방을 물리치고 오늘의 치욕을 없던 거로 하자"고 선언한 뒤 심지에 불을 붙였다.
화약 상자의 심지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자 해동갑족의 마음도 심하게 요동쳤다. 일단 심지부터 끄고 이야기하자는 해동갑족의 말에 "연명이 먼저다"며 단호함을 내세웠다. 이방원의 박력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결국 두 손을 든 해동갑족 가문들은 저마다 "화약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자네말이 옳기 때문이야"라며 상소에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난세를 지켜보기만 하며 사리사욕을 채운 귀족들이 이방원에게 제대로 한방을 먹은 것.
이렇듯 차례차례 해동갑족 가문들의 이름이 적혀져 나갔고 마지막으로 이방원의 장인어른인 민제만 남은 상황이 됐다. 이방원의 겁박이 허세라고 생각한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순간에도 붓을 잡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화약에 불이 붙을 것 같은 불안감에 모두 발을 동동 굴렀다. 물론 이방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동공은 심하게 떨려고 이를 지켜본 민제는 황급히 붓을 잡아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일촉즉발 상황에 심지는 잘려나갔고 민제는 뒤늦게 화약 상자를 확인했지만 그 안에는 모두를 떨게 만든 화약 대신 돌덩이만 가득했다. 민제와 해동갑족을 속이기 위해 자신까지 속인 이방원은 "두려웠다"는 진심을 전했다.
수백 번의 반전으로 시청자를 쥐락펴락한 '육룡이 나르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개와 배우들의 명품연기로 매 순간 시청자를 흥분하게 만든다. "홍인방, 당신에겐 최후의 아침이 될 것입니다"라는 이방원의 선전포고를 끝으로 16번째 항해를 마친 명품 드라마. 또다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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