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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기사 좀 쓰지 마세요."
27일 사직 롯데전. 고향 부산에서 그는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겼다. 대타로 출전해 멀티홈런과 생애 첫 그랜드슬램을 쏘아올렸다. 대타 멀티홈런도, 19년 차 첫 만루포도, 그저 생소하게 느껴지는 기록이다.
이날 박한이는 팀에 꼭 필요한 만점 활약을 펼쳤다. 7-4로 쫓기던 5회초, 박한이는 김동엽의 대타로 타석에 섰다. 추가점이 꼭 필요했던 순간. 롯데 세번째 투수 오현택의 137㎞ 직구를 밀어 좌중월 솔로포를 날렸다. 이 홈런을 신호탄으로 강민호의 백투백 홈런과 최영진의 홈런이 잇달아 터지며 10-4.
"점수 차가 많이 나다 보니까 (마음이) 편했던 것 같아요. 밀어서 친다는 느낌으로 친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네요."
베테랑은 팀이 가장 어려울 때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낸다. 타선의 집단 슬럼프로 반전이 필요한 순간, 박한이가 있었다.
"제 홈런 2개보다 팀이 이긴 것이 중요하죠. 이 분위기를 이어서 우리 팀이 상승세를 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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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던 과거. 영광의 훈장이지만 때론 그림자가 된다. 옛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제법 많다. 박한이는 철저히 현재를 산다. 착각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언제 호출받을지 모르는 대타 인생. 박한이에게는 낯 선 변화다. 하지만 그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단 한순간의 결과를 위해 철저히 준비한다. 경기 전 배팅 훈련을 진지하게 임한다. 선발 출전 선수가 아님에도 경기 전에는 가장 먼저 벤치에 나온다. 빈 공간에서 틈 나는 대로 배트를 휘두른다.
과거의 내가 아닌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이가 먹었다고 생각해야죠. 어쩌겠어요." 부끄럼 없이 내뱉는 말. 어쩌면 부끄러움은 나이를 먹는게 아니라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18년 간 박한이에게 프로 무대는 죽느냐 사느냐의 전쟁터였다. 앞뒤를 돌아볼 시간도, 좌우를 보며 즐길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인드를 바꿨다. 마음을 비웠다. 그러자 변화가 찾아왔다. 얼마 남지 않은 야구가 더 소중하고, 더 즐거워졌다.
"내 나름의 마인드 컨트롤이랄까요. 생각을 비우려고 하는 상태에요. 지난 시절 동안 단 한번도 타석에서 욕심을 버리지 못했어요. 올해만큼은 비우고 즐기자는 마인드로 임하고 있습니다."
19년 만에 처음으로 경험하는 즐기는 야구. 야구장 출근길에, 시합 전 준비과정 속에 선물 처럼 설렘이 찾아왔다.
"야구장에서 만큼은 즐길 수 있는 야구를 하자는 생각이 들어요. 스스로 생각에 변화를 주다보니 즐거워요. 19년 동안 이런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후배들에게 그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선배다. 시즌 초 집단 슬럼프에도 박한이는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조언이요? 안했어요. 저도 매년 초반에 좋은 결과를 낸 적이 한두번 밖에 없었거든요. 스스로 느끼고 깨달아야죠. 제가 함부로 얘기하다 보면 더 깊은 스럼프가 올 수 있거든요."
인간은 죽음에 대한 성찰 속에서 보석 같이 빛나는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다. 끝이 있음을 인식할 때 숨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 있다.
현역 생활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는 최고령 선수. 그는 오늘도 그라운드에서 단 한가지만을 생각한다.
"어떻게든 살아나가려고 집중하죠. 밀어치자는 생각도 하고요. 즐기다 보면 자연스레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어요?"
부산=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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