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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제 인터뷰 기사가 많이 읽히려면 (이)대형이형 비밀이라도 폭로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국내 2루수 최초로 2년 연속 20홈런. 값진 기록을 자신이 이정표가 되어 다시 썼지만, 골든글러브 수상이 불발된 그날 밤은 술로 쓰린 속을 달랬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도, 우리 팀도 더 성장해야겠다"고.
신년을 이틀 앞둔 12월 30일. 수원 경수대로에 위치한 한 일본 음식점에서 박경수를 만났다. 딸 둘 그리고 아내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막 마치고 돌아온 그는 유쾌했고, 생각에 무게가 있었다.
-새해에 주장 연임을 자청했다고 들었는데.
솔직히 힘든데 이대로는 못 물러나겠다. 내가 주장을 하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없는 것 같아서 후배들에게 미안했다. 후배들이 나를 보고 뽑은 자리인데 해준 것이 없다. 팀 성적도 바닥이고. 이대로 다음 사람이 주장을 하면 더 큰 부담을 가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적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올리고, 무언가 하나만큼은 만들어놓으면 누가 해도 연결이 되고 전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1년 더 하겠다고 자청했다. 다행히 김진욱 감독님께서 받아주셨다.
-어린 선수들이 많고, 굴곡 있는 선수들이 많아서. 선수단을 이끄는 데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다들 스토리가 있다. 주장이라고 해서 선수들을 무섭고, 카리스마 있게 이끄는 것도 괜찮지만 반대로 생각했다. 우리 팀은 나이도 어리고, 다른 팀에서 모였고, 상처도 있다. 그런데 자존심까지 건드리면서 싫은 소리를 하는 건 나중 일이다. 분위기 자체가 고참들이나 주장이 나서지 않아도 가라앉는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하게 되더라. 물론 사람인지라 그것도 어렵다. 2~3번 정도 화를 냈었다.
-어떤 게 가장 화가 나나.
선수들이 실수를 하고, 실책을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누구나 다 할 수 있으니까. 정신적인 실수들은 화가 난다. 본헤드 플레이나 포메이션 사인이 났는데 타이밍이 하나도 안 맞고, 이해를 못 하고 있을 때. 거기서는 정말 못 참겠더라. 경기 중에도 미팅 소집해서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뭐라고?
지금 뭐하는 거냐. 관중석 안보이냐. 팀이 이기고 지는 것은 상관이 없는데, 우리가 이 플레이를 하려고 미국에서 오전 내내 몇 시간씩 고생을 했는데 실책으로 쓸데없는 점수를 내주면 어떻게 이길거냐고 말했다. 또 후배들이 기죽고, 자신 없는 플레이를 하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난다. 그래서 처음엔 좋게 이야기한다. '형이 볼 때는 아닌 것 같다. 빨리 잊어라. 경기 많이 남았으니까.' 이야기했는데도 안 통하면 강하게 말해야 한다. 팀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것 빼고는 없다. 선수들이 다들 착해서.
-누구보다 간절함을 잘 아는 선수라서 동질감도 느끼지 않나.
그렇다. 또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한 마음으로는 자신에게 득될 것이 없다.
-주장의 책임감이 무겁다. 다른 팀 주장들도 다들 힘들다고 하던데.
근데 정말 힘들다. 다들 내게 얼굴이 왜 이렇게 어둡냐고(웃음). 누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자리 자체가 잘해야 본전이다. 잘 해보려고는 하는데, 다행히 후배들이 잘 도와줘서 잘 버티고 있다.
-중간급에서는 누가 협조적인가.
투수조장 맡고 있는 홍성용. 성용이도 LG 시절에 같이 생활했었고, 그 친구 성격을 아니까. 적합하다 싶었다. 성용이가 많이 도와줬고, 야수 중에서는 오정복, 하준호 이런 선수들이 도와줬다. 정복이가 굉장히 착하고, 잘하는데 자기 이미지 관리만 조금 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웃음).
-안색이 안 좋았던 이유 중 하나 아닌가. 선수단에 안 좋은 일이 많았던 것.
말도 못했다 사실. 그래서 고민을 되게 많이 했고, 결론내린 것은 우리가 조금 더 팬들에게 다가가자. 다가가서 잘해주자. 내가 구단에 요청했다. 우리가 이기는 날에는 간단한 것도 좋으니 선물 같은 걸 준비해달라. 구단에서 '배지'를 준비해줬다. 'WIN(승리)'이라고 써져있다.
-기념품 같은 것을 나눠주는 건가.
선수단 미팅에서 '우리가 저지른 일이니 더 다가갑시다. 퇴근하는 길에 벳지 3~4개라도 집어서 팬들에게 나눠줍시다'라고 이야기했는데, 굉장히 반응이 좋았다. 퇴근하고 집에 10~20분 늦게 가더라도 사인 다 해주자고 했는데 다들 잘 지켜줬다. 그런 식으로 풀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일은 저질러졌는데, 누구를 죽이니 살리니 하면 방법이 있나.
-인터넷 댓글도 보나.
다 본다. 안 보는 것이 좋은데,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걸로 상처를 많이 받았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다 자기 몫이다. 열심히 잘하면 없어지는 이야기니까.
◇이구동성 "kt, 이제 야구만 잘하면 된다"
-각오는 했지만 2년 연속 꼴찌를 한 것은 기운이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올 시즌 초반에는 좀 되는듯 싶었다. 그런데 선수들 자체가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그 와중에 부상도 있었다. 한 명씩 빠지다 보니 '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들이 쌓였다. 그때부터 흔들리지 않았나 싶다.
-2년 동안 kt에서 뛰면서 직접 본 긍정적인 부분들은 어떤 게 있나.
구단에서 특이하고 참신한 시도를 많이 한다. 팀 성적만 조금 뒷받침되면 효과가 굉장히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프링캠프에서 선수들에게 무제한 로밍 데이터를 주신 것도 굉장히 큰 힘이 됐다. 힘든 훈련이 끝나고 가족들과 편하게 통화할 수 있어서 다들 만족했다. 또 전력 분석 앱도 좋다. 개개인이 상대 투수와 전적 영상들이 정리되어 있어 편하게 대비하고 있다. 홈런 영상, 안타 영상들도 다시 보기가 쉬워서, 타격감 안 좋을 때 도움이 된다. 이제 야구만 잘하면 되겠죠?(웃음)
-홈런 영상 다시 보기는 즐겨 하나. 역전 만루 홈런이나 끝내기 홈런이 기억에 남겠다.
2016시즌에는 KIA전에서 역전 만루 홈런 친 장면도 이상적인데, 개인적으로는 LG전 끝내기 홈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함께 자리한 구단 직원이 '음료 CF가 들어왔어야 할 장면'이라고 칭찬하자) 잘생긴 대형이형이었으면 들어왔을 텐데 나는 '메리트'가 없다.
-새로운 사령탑 김진욱 감독이 부임했다.
두산 선수들에게 어떤 분인지 많이 물어봤다. 다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더라. 너무 좋으시다고. 또 대화를 좋아하신다고 했다. '형 아무 이야기나 하세요. 잘 받아주세요'라고 하더라. 그래서 미국 캠프에 가서 정말 아무 말씀이나 드려볼 생각이다(웃음).
-kt에 변화가 많다.
다른 팀이었지만 오고가며 인사를 드렸던 분들이고 워낙 좋은 팀에 계시다 오신 분들이다. 솔직히 기대하는 부분도 있다.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하시더라. 그래서 크게 어려울 것은 없는 것 같다. 감독님과도 아무 이야기나 더 많이 하면.
-김용국 수비코치가 개그 감각으로 마무리캠프 분위기를 바꿔놨다는 소문이 있던데.
우리 팀은 그런 분이 필요했다 정말. 그래서 빨리 스프링캠프에 가고 싶다. 코칭스태프, 선수단이 스킨십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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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길지 않은 팀이라 팬들의 존재가 더 소중할 것 같다.
우리 팬들이 참 정이 많다. 야구단을 오래 기다리셨던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야구를 좋아하긴 하는데 응원팀이 없고, 생긴다고 하니까 기대를 많이 하신 분들이 꽤 있더라. 그런 분들은 좋은 성적만 바라시지는 않는다. 야구를 좋아하고, 가족들과 같이 야구장에 와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신다. 그래서 젊은 친구들도 많지만 가족 단위가 꽤 많다. 특히 어머니들이 잡아서 '우리 아들 사인 한 번만 해주세요' 이런 경우가 많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지나칠 수가 없다. 안 해주면 집에서 무슨 일이 나거든(웃음). 그걸 잘 알기 때문에 그 선수는 그 아이에게 평생 찍히는 거다(웃음). 그래서 최대한 해드리려고 한다.
-kt팬들이 사랑하는 선수 아닌가.
내가? 글쎄. (함께 자리한 구단 직원이 유니폼 판매 실적 2위라고 귀띔) 1위는 당연히 이대형. 대형이형은 범접할 수 없는 존재다(웃음). 형이 유니폼 판매 실적 조작하는 것은 아니겠지. 대형이형 계좌를 한번 추적해봐야 한다. 뭐 하나 나올 수도 있다.
-kt 선수단의 주장으로서, 팬들에게 약속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제가 약속을 자꾸 어겨서(웃음). 올해도 꼴찌 안 한다고 했는데…. 그럼 올해는 꼴찌를 면하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팬들 몇 분을 초대해서 밥을 사야겠다. 분명히 내년에는 밥 살 일은 없을 것이다.
-선수들에게도 도와달라고 한 마디.
너무 잘 도와줘서 고마운데, 우리가 신생팀이라는 이야기를 더이상 안 들었으면 좋겠다. 사실 지금 경기에 나가는 주전 선수들은 어리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신생팀 이미지를 빨리 벗고, 다른 팀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여건이 분명히 있다. 지금까지 잘 해왔지만 조금 더 하나가 돼서 시즌을 잘 치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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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에 있을 때부터 유독 포스트시즌과 인연이 안 닿는다.
LG 마지막 시즌에 할 뻔했는데, 다치는 바람에 못 했다. 하고 싶다 솔직히. 해보고 싶고, 못 하면 은퇴하고 나서도 생각이 날 것 같다. 결과를 떠나 좋은 추억인데, 꼭 은퇴 전까지는 해보고 싶다. 그래도 LG에서 다치고 나서 선수들에게 감동을 많이 했다.
-왜?
(오)지환이가 MVP를 받고 나서 내 이야기를 해줬다. 어린 친구가 이런 이야기까지 해주는구나 싶었다. (이)진영이형도 LG에 있을 때 내게 기사로 편지를 써줬었고. 글을 보면서 울컥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던 것 같다. 정말 고마웠다. 비록 못 뛰었지만.
-앞으로 박경수의 야구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은 내 색깔을 찾아서 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는 진짜 골든글러브도 받아보고 싶고, 은퇴하기 전까지 여기서 좋은 후배들과 함께 가을야구도 꼭 해보고 싶다. 지금 저희 팀을 좋아해 주시는 팬분들이 늘 지금처럼 영원하면 좋겠다. 너무 정이 많고 좋은 팬들이 많다. 선수들도 다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잘 야구 인생이 마무리됐으면 좋겠다. 계속 20홈런 이상 치고 싶고, 30개도 도전해보고 싶고 100타점도 도전해보고 싶다. 올해 같은 경우는 목표를 달성했다. 팀 성적이 안 좋아서 아쉽지만, 이제 목표를 조금 더 높게 잡아보고 싶다. 내 가능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도전해보고 싶다. 나이는 한 살 한 살 더 많아지고 있지만(웃음).
-20대 초중반 잘 몰랐던 시절의 박경수처럼 스스로 알을 깨지 못한 선수들이 많다.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
kt에 와서 많이 느낀 것은 멘탈적인 부분과 야구 경기를 할 때도 집중해야 하는 순간만 해야 한다는 것. 어릴 때는 경기가 3시간30분이면 내내 집중하고 있었다. 근데 사람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다. 그때는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집중하고 있었다. 그게 오히려 나를 경직하게 하고, 해가 됐던 것 같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 계속 집중을 하다 보면 결론은 그게 집중하는 게 아니다. 그냥 굳어있는 것뿐이다. 언젠가는 다 가능성이 있어서 프로에 왔기 때문에 언젠가는 빛을 본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수원=나유리기자 youll@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