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만년 유망주' 정의윤, LG 4번타자 되기까지…

김용 기자

기사입력 2013-07-04 10:51



"야구를 한 이후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야구선수가 가장 행복할 때는 그라운드 위에 서있을 때다. 겨우내 피땀 흘려 가꾼 자신의 기량을 팬들에게 원 없이 선보이는게 모든 선수들의 꿈이다. 올시즌 그 꿈을 확실하게 이뤄낸 선수가 있다. 주인공은 LG의 새로운 4번타자 정의윤이다. 신바람 야구로 상승세를 타고 있는 LG. 베테랑 선수라도 매경기 바뀐 타순에서 경기에 임해야 하고, 심지어는 주전 라인업에서 빠질 때도 있다. 하지만 정의윤 만큼은 부동이다. 그것도 타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인 4번에서 부동이다. 올시즌 정의윤이 김기태 감독으로부터 얼마나 큰 신임을 받고있는지 알 수있는 대목이다.

"변명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정의윤은 부산고를 졸업하고 지난 2005년 LG에 입단했다. 신인드래프트 2차 1라운드 전체 3순위로 LG의 선택을 받았다. 당시 받은 계약금이 2억3000만원. LG의 거포 외야수 갈증을 해결해줄 적임자로 손꼽혔다.

하지만 프로생활이 순탄치 만은 않았다. 데뷔 첫 해 106경기에 출전하며 8홈런 42타점을 기록해 기대를 모았지만 해가 갈수록 출전기회가 줄어들고, 성적은 떨어졌다. 군 복무를 마친 후 2011 시즌을 앞두고 다시 돌아왔지만 지난 2년 역시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매시즌 공통점이 있다. 시즌 전 스프링캠프에서 엄청난 기대를 모았다. 팀의 코칭스태프는 물론이고, 2011 시즌을 앞두고는 일본프로야구의 전설적인 강타자 기요하라가 정의윤이 타격훈련을 보며 "이 선수가 어찌 후보란 말인가"라며 안타까워 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렇게 시즌 초반에는 큰 기대 속에 출전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결국엔 시즌 중후반부터 자취를 감추는 패턴이 반복되고 말았다. 코칭스태프 뿐 아니라 팬들도 만년 유망주 꼬리표를 달아버린 정의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정의윤은 지난 8년의 프로 생활을 돌이키며 "주변의 기대를 잘 알고 있었다. 항상 정말 많은 연습을 했다. 그리고 자신감도 있었다. 때문에 거기에 대한 큰 부담을 느낀 적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내 솔직한 답변이 이어졌다. 그는 "예를 들어 좌완 선발이 나오는 경우, 처음 두 타석만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안타를 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던 것 같다"고 돌이켰다. 이어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다 그렇게 기회가 주어지고 그 기회를 잡아야 한다. 변명은 필요없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나마 나는 많은 기회를 얻었던 복받은 선수였다"고 말했다.

"아직 확실한 4번타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올해는 달랐다. 김기태 감독의 믿음 속에 정의윤은 시즌 초반부터 꾸준히 출전기회를 잡았다. 처음에는 주로 6번, 7번 타순에 나섰지만 어느 순간 정의윤의 이름은 타선 4번째 칸에 고정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정의윤이 4번타자로 나서기 시작해 안타를 뻥뻥 때려내기 시작한 5월 말부터 LG는 무서운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정의윤이 중심을 잡아주니 팀 타선에 안정감이 생겼다"는 얘기가 들렸다.

말수도 적고 무뚝뚝한 전형적인 부산 사나이. 4번타자 얘기가 계속 나오자 "부끄럽다"며 손사래치고 만다. 정의윤은 "4번을 절대 의식하지 않는다. 우리팀에는 워낙 훌륭한 좌타자들이 많아 감독님께서 그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우타자인 나를 4번에 넣으신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다른 타자들과 똑같다. 매 타석 어떻게든 살아나가겠다는 생각 뿐이다. 다만 중심타순이기 때문에 주자가 있을 때는 불러들이고, 없을 때는 찬스를 만들자는 기본 베이스를 깔고 타석에 들어선다"고 밝혔다. 김기태 감독도 "1회 세 타자가 아웃되면 정의윤은 힘있는 1번타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라며 정의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했다.

주변에서는 4번타자 치고 장타가 부족한 것이 아니냐고들 한다. 정의윤은 3일 기준 3할2푼의 고타율을 기록하고 있지만 홈런이 2개에 그치고 있다. 장타율도 4할3푼3리로 순위권에 드려면 한참 멀었다. 하지만 정의윤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솔직히 그런 말을 많이 듣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다"며 "우리 팀 사정에 맞는 플레이를 하는게 홈런을 많이 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정의윤의 가치는 성적으로 단순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최근 경기를 보면 1경기 1개의 안타를 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온다. 극적인 적시타 또는 추격이 꼭 필요한 시점에 안타가 터진다. 대역전승을 거둔 3일 한화전에서도 역전에 성공한 7회 1사 1루 상황서 정의윤이 좌전안타로 출루하며 찬스가 만들어졌다. 정의윤의 6월 득점권 타율이 무려 6할에 달하며 리그 전체 1위를 기록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달라진 우리 팀, 절대 질 것 같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의윤의 잠재력이 폭발되지 못하는 사이, 소속팀 LG도 추락을 거듭했다.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그 중 8년을 정의윤도 함께 했다.

올시즌 달라진 LG를 누구보다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정의윤이다. 그는 "확실히 달라진게 있다. 나 뿐 아니라 모든 선수가 느끼겠지만 요즘에는 지고 있어도 절대 질 것 같지가 않다. 정말 신기하다"고 말했다. 공교롭게 정의윤과 인터뷰를 한 시점이 3일 한화전을 앞두고서였다. 인터뷰를 마친 후 경기가 진행됐고, LG는 초반 5점의 점수차를 극복하고 9대8 기적같은 역전승을 일궈냈다. 정의윤의 자신감이 허투가 아니었다.

정의윤은 "올해는 정말 팀이 4강에 진출하고, 그 이상의 성적에 도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며 "개인적인 목표도 특별하게 없다. 이대로 팀이 쭉 상승세를 타 가을에 야구를 할 수 있었으면 하는게 내 유일한 바람이다. 팀 성적만 좋으면 내 개인의 영광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정의윤은 지난 5월 26일 SK전에서 극적인 끝내기 안타를 때려내며 영웅이 됐다. 그리고 경기 후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팬들을 향해 "다른 선수들이 LG를 떠나 잘하는데, 저는 LG에 남아 잘하고 싶습니다"라고 당당히 외쳤다. 그 때부터였다. 그동안의 말못했던 설움을 팬들 앞에서 시원하게 털어내서였는지, 8년간 잘 되지 않던 야구가 신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어차피 어렸을 때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선수들이 프로에 입단한다. 결국 야구선수가 1군의 스타로 거듭나는 건 정말 사소한 계기를 통해 정신적으로 강해질 때라고 한다. 정의윤의 새로운 야구인생, 8년의 먼 길을 돌아 지금부터 시작인 것 같다.


김 용 기자 awesome@sportschosun.com

:) 당신이 좋아할만한 뉴스